▲ 서울 성수동 매장 앞에 선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 창립자 유석영 전 대표. 그는 2010년 12월 파주에서 사회적기업을 설립했으나, 3년 뒤 회사는 폐업했다. 그러다 아지오는 2017년 11월 조합원들과 시민들의 마음이 모여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재탄생했다. <이재우>
셰르파 8명을 포함한 19명의 팀은 그 소리를 길잡이 삼아, 시각장애인도 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과 공동체의 힘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이후 에릭은 7대륙 최고봉 등정에도 성공했다.
12년 뒤인 2013년 10월, 한국의 남쪽 제주 가파도에서도 한 사내가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수제화 브랜드 아지오(AGIO) 창립자인 유석영 전 대표다. 세상은 그를 ‘앞을 보지 못하는 CEO’라고 부른다. (아지오는 이탈리아어로 ‘편안하다’는 뜻이다)
유석영은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관광객들이 빌려 타는 자전거가 타고 싶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었다. 10대 후반 이후 32년 만에 잡아보는 자전거 핸들이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넘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무모한 용기가 솟구쳤다.
에릭 바이헨마이어처럼 도움을 주는 일행이 있었다.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3초마다 ‘따르릉~’ 신호를 보내기로 했다. 그 작은 소리를 길잡이 삼아 흩어진 감각을 발끝에 모으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어, 어, 굴러가네.”
자전거가 움직였다. 10분, 20분, 어느새 40분이 흘렀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페달 끝에서 묘한 자유가 느껴졌다. 그날 그는 단순히 자전거를 탄 것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자신에게 씌워놓았던 한계를 벗어던졌다.
어쩌면 ‘유석영’이라는 이색 경영자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문장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그날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로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예단해 버린 나 자신이 더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 가파도의 길: 자신의 한계를 벗어난 자유의 공간
에릭 바이헨마이어의 글로벌한 모험과 유석영의 개인적 경험은 규모는 달라도 놀랍도록 닮았다. 둘 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경험을 혼자 간직하지 않았다. 바이헨마이어는 비영리단체 ‘노배리어스(No Barriers)’를 공동 설립해 장벽을 넘어 가능성을 발견하는 삶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유석영도 가파도에서 얻은 깨달음을 아지오로 가져왔다. 자신을 이끌었던 ‘따르릉’ 소리를 청각장애인 장인들을 위한 ‘신뢰의 도구’로 삼았다. “나도 할 수 있고, 당신들도 할 수 있다.” 그 신호를 믿고 구성원들은 다시 페달을 밟았다. 아지오의 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조직심리학에서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 정도를 ‘자기효능감’이라고 한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가 발전시킨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실제 능력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믿음이 행동을 시작하게 하고, 어려움을 견디게 한다.
유석영에게 가파도의 ‘자전거 타기’는 바로 그 자기효능감이 다시 깨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2017년 봄, 많은 이들이 아지오를 다시 기억하게 됐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신은 밑창이 다 닳은 오래된 구두 한 켤레 때문이었다.
2013년 자금난과 장애인 기업에 대한 편견 속에 문을 닫았던 아지오의 구두였다. 폐업의 아픔 속에 묻혔던 그 구두는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서울 성수동 아지오 매장에서 다시 만난 유석영은 훨씬 더 열정적인 모습이었다. 비록 임대이지만 없던 매장을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아지오는 청각장애인 장인들과 시각장애인 CEO가 함께 만드는 수제화 브랜드다.
보이지 않는 사람과 들리지 않는 사람들. 이런 불편한 만남을 처음 듣는 사람들은 결핍부터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결핍과 결핍의 조합이 아니라, 강점과 강점이 교차하는 조직이다.
청각장애인 장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대신, 구두를 만드는 손끝 감각에 몰입하는 촉각의 강점을 갖고 있다. 유석영은 볼 수 없는 대신, 세상과 고객을 향해 아지오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말의 강점을 갖고 있다.
아지오를 만드는 사회적협동조합 ‘구두만드는풍경’의 성남 공장에는 열여섯 명의 청각장애인 장인과 여섯 명의 일반 직원, 그리고 그들을 이어주는 두 명의 수어통역사가 함께 일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일터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신발을 만드는 곳이다. 서로의 손짓과 눈빛으로 결핍을 채우고 강점을 더하는 이 특별한 장소는 단순한 구두 공장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 아지오(AGIO)는 시각장애인 CEO와 청각장애인 장인들이 만드는 수제화 브랜드다. 아지오는 이탈리아어로 ‘편안하다’는 뜻이다. <이재우>
필자가 유석영이란 사람과 아지오에 오랫동안 주목해 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유석영이 현장에서 일구어낸 ‘장애인 자립경제 모델’은 우리 사회가 오랜 기간 고민해 온 사회적 경제 모델의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오랫동안 ‘시혜와 보호의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 정부 지원금이나 기업의 기부금에 의존하는 장애인 일터는 재정 구조가 취약할 수밖에 없고, 대량생산과 속도의 경쟁을 중시하는 시장에서 장애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약점’으로 분류되기 일쑤다.
하지만 유석영이 바라보는 장애는 달랐다. 그는 결핍을 정성과 몰입이라는 강점으로 바꾸고, 소외된 노동을 장인의 기술과 자부심으로 바꾸려 했다. 그가 만들고 싶은 것은 장애인을 불쌍해서 사주는 ‘동정의 구두’가 아니다. 장인의 기술과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시장에서 당당하게 선택받는 ‘존엄의 구두’다.
맹자가 말한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는 말처럼, 정직한 노동으로 당당한 소득을 얻을 때 비로소 자립의 마음도 단단해진다.
아지오가 부활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유석영의 열망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유시민 작가를 비롯한 많은 조합원과 시민 주주들이 그의 뜻에 마음을 보탰고, 그 마음이 시민 자본으로 이어졌다. 풀린 신발끈을 밟아 넘어지듯, 한 차례의 독한 실패를 겪은 유석영은 더 단단해졌고 그 곁에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단순히 장애인을 돕기 위해 돈을 보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장애인의 노동도 시장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음에 투자한 것이다. 그렇게 시민 자본은 장애인의 노동과 결합했고, 아지오를 단순한 공장이 아닌 인간의 존엄이 숨 쉬는 일터로 바꾸었다. 차가운 자본주의의 바닥에서 새로운 ‘연대형’ 사회적 경제 모델이 탄생한 것이다.
▲ 시각장애인 유석영 전 대표가 청각장애인 장인들이 만든 명품 수제화의 가치를 설명하고 있다. <이재우>
유석영에게는 가파도 말고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장소가 있다. 바로 소록도다.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할 때마다 소록도로 갑니다.”
2010년 12월 파주에 사회적 기업을 세울 때도 그랬다. 2013년 8월 회사를 닫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2017년 11월 아지오가 조합원들과 시민들의 마음이 모여 사회적협동조합으로 재탄생할 때도 소록도로 향했다.
구두가 사람의 가장 낮은 곳인 발을 감싸듯, 소록도 역시 우리 사회가 가장 낮은 곳으로 밀어놓았던 소외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유석영은 1988년 CBS의 장애인 리포터 시절 취재를 위해 소록도를 찾았다가 그곳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런 소록도는 유석영에게 결단의 장소인 동시에, 자신의 판단 기준을 극단으로 정제하는 독대의 공간에 가깝다. 그는 거기서 아지오 구두는 장인의 자부심이 담긴 ‘존엄의 구두’라는 가치를 되새겼다. 그러곤 다시 단단히 신발 끈을 고쳐 매었다.
경영자들은 누구나 고비의 순간을 맞는다. 유석영이 그랬듯 그들은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페달을 밟았을 것이다. 유석영에겐 그게 어머니였다. 생전에 그의 어머니는 이런 말로 낙심하던 아들을 일깨워줬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못해도 석영이 너는 할 수 있다.” 이재우 경영어록서 ‘일언천금’ 저자
| 이재우는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 글로벌 경영인들의 어록을 모은 '일언천금'의 저자이기도 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