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1분기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 1760억 달러 가운데 반도체 수출액은 443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8% 이상 증가했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20%에서 올해 25%로 늘어났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올해 1분기 전체 수출액 1760억 달러에서 반도체 수출액은 443억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38% 이상 증가했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5.2%다. 전체 수출 증가율 12.8%보다 배 가량 높은 것이다. 우리나라 수출의 4분의1이 반도체인 셈이다.
한국거래소의 '유가증권시장(코스피) 12월 결산법인 2025사업연도 결산실적'에 따르면 지난해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714개 기업의 별도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1611조6834억 원, 137조477억 원으로 2024년 대비 3.48%, 29.55% 각각 증가했다.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뺀 712개 기업의 매출과 영업이익은 2024년보다 각각 0.46%, 3.69% 감소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합산 영업이익은 67조6100억 원으로 지난해 국내 코스피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사실상 절반을 차지했다.
게다가 올해 1분기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연결기준)은 약 94조8103억 원으로, 코스피 상장사 전체 영업이익의 70%를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거시경제 지표상으로만 본다면 한국은 바야흐로 '초호황'의 정점에 서 있는 듯하다. 정부와 기관들은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이 2%대로 올라서며 경제 회복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고 자평한다.
하지만 통계의 장막을 걷어내고 민생의 현장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상황은 전혀 딴판이다. 화려한 수출 성적표와 차디찬 민생 체감 경기 사이의 괴리는 수치로도 증명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최근 경제 성장률 기여도의 50% 이상이 반도체 단일 부문에서 나왔다. 순수출이 성장률을 지탱하는 동안 민간 소비를 뜻하는 내수 기여도는 그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우리는 지금 반도체라는 거대한 나무에 가려 숲 전체가 말라 죽어가는 ‘착시 현상’을 목격하고 있다.
현재 한국 경제가 직면한 가장 골 깊은 위기는 산업 간 불균형이 극도로 심화되는 ‘K자형 양극화’다. 국가 경제의 4분의 1이 반도체 단 하나의 품목에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가 구름 위를 걷는 동안 우리 경제의 기초 체력을 담당해온 전통 제조업은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최근 통계를 보면 반도체를 제외한 주력 산업인 철강(-4.5%)과 석유제품(-9.4%) 등은 오히려 역성장하거나 정체 상태다. 중국의 거센 추격과 글로벌 수요 둔화로 제조업 가동률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는 반도체 사이클이 하락 국면에 진입할 경우, 한국 경제를 지탱해줄 ‘플랜B’가 없어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수 있다는 구조적 공포를 의미한다.
과거 성장기에는 ‘대기업이 잘 되면 서민도 잘 산다’는 낙수효과가 어느 정도 유효했다. 기업의 이익이 설비 투자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대규모 고용 창출과 소득 증대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반도체 초호황에서 이런 메커니즘은 작동을 멈췄다.
반도체는 전형적 ‘자본 집약적 장치 산업’이다. 매출은 천문학적이지만, 자동화 스마트 팩토리 특성 상 고용 창출 효과는 서비스업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2026년 1분기 영업이익은 약 94조8103억 원으로, 코스피 전체 영업이익의 70%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삼성전자 반도체 파운드리 공장 내부 모습. <삼성전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임직원의 성과급이 한 해 1인당 7억 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데 비해 중국과 경쟁에서 밀리고 있는 전통 제조기업 임직원들은 성과급이 아니라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내수 시장의 붕괴는 더욱 심각하다. 가계는 고물가와 고금리 직격탄을 맞고 있다. 2025년 기준 실질임금 상승률은 물가 상승률을 간신히 턱걸이하거나 하회하며 서민들의 실질 구매력은 사실상 뒷걸음질 쳤다.
특히 일자리의 80% 이상을 담당하는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현실은 '재난'에 가깝다. 2024년 폐업자 수는 92만5천 명에 달했으며, 창업 대비 폐업률은 무려 85.2%까지 치솟았다. 1천조 원을 넘어선 자영업자 부채와 치솟는 연체율은 ‘반도체 호황’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를 무색하게 만든다. 내수가 죽으면 소비가 위축되고, 이는 다시 자영업자의 몰락과 가계 부채 위기로 이어지는 파멸적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한다.
단순히 경제성장률 수치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그 성장의 질과 분배를 따져봐야 한다. 반도체가 벌어다 주는 막대한 부를 국가 전체의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는 마중물로 전환하는 전략이 절실하다.
반도체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인공지능(AI), 바이오, 이차전지, 우주항공, 로봇 등 미래 전략 산업에서 중소·중견기업들이 자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내수 진작을 위한 정교한 핀셋 지원이 병행되어야 한다. 고금리에 신음하는 소상공인에 대한 금융 지원과 더불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실질적으로 높일 수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
현재 한국 경제는 마치 거대한 ‘상체 비대증’ 환자와 같다. 반도체라는 강력한 팔 하나는 근육질로 무장돼 있지만, 이를 지탱해야 할 다리인 내수와 중소기업은 가늘어질 대로 가늘어져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위태롭다. 균형 잡힌 신체만이 거친 폭풍우를 견뎌낼 수 있듯, 국가 경제 역시 균형을 상실한 성장은 지속될 수 없다.
반도체의 눈부신 성장은 분명 우리 경제가 일궈낸 갚진 성과다. 하지만 그 빛이 너무나 강해 발밑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거대한 경기침체라는 구덩이에 빠지게 될 것이다.
화려한 숫자 뒤에 가려진 서민들의 한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너진 민생을 다시 세우는 데 국가적 역량을 쏟아야 할 때다. 김승용 산업&IT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