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이 채용할 때 인문학을 중시하는 까닭  
▲ 스티브 잡스는 2011년 아이패드 신제품을 발표하면서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순신 정약용 세종대왕 등 역사 속 인물의 발명품중 공학도의 자질과 연관있는 발명품을 고르고 그 이유를 서술하라.” 현대차그룹이 올해 신입사원 채용시험에 출제한 역사 에세이 문제다. 

“세종 때 과거시험에서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들이고 내치는 방법에 대한 문제가 출제됐다. 본인이라면 조직의 리더로서 어떻게 하겠는가.” “석굴암 불국사 남한산성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한국 문화유산 중 두 개를 골라 설명하라.” 등 역사적 사실을 제시하고 수험생이 생각을 서술하도록 하는 이런 문제가 대기업 입사시험에 출제됐다. 수험생들은 문제 3개 중 2개를 선택해 40분 동안 각각 700자씩 답변을 작성해야 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하반기에 이어 올해 상반기 신입사원 채용시험에서도 역사 에세이 문제를 냈다. 특히 이번 상반기에 현대차그룹뿐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의 신입사원 채용시험에서도 역사문제 출제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삼성그룹은 신입사원 공개채용 2차전형인 ‘삼성직무적성검사(SSAT)’에서 직무상식영역 문항중 20%를 역사문제로 출제했다. SSAT에서 석탑사진을 보여주고 그 시대에 대한 배경을 묻거나, 독립운동가의 유언을 제시하고 이 말을 남긴 독립운동가의 사진을 고르게 하는 문제가 나왔다.

한 SSAT 응시자는 “제1, 2차 세계대전이나 한국 현대사같이 비교적 잘 알려진 문제는 많지 않고, 발해 백제 러시아 등과 관련된 문항이 눈에 많이 띄었다”고 말했다.


GS그룹은 GS칼텍스와 GS에너지 등 일부 계열사 신입사원 채용과정에 한정해 실시한 한국사 역량평가를 올 상반기부터 전 계열사에 확대시행하기로 했다. GS그룹 관계자는 “허창수 회장이 평소 올바른 역사인식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들을 통해 그룹의 지속성장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 반영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SK그룹도 지난달 27일 진행되는 신입사원 채용시험 ‘종합역량검사(SKCT)’에서 역사문제 10문항을 객관식으로 출제했다. SK 관계자는 “지원자가 한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필기시험에 역사영역을 추가한 것”이라고 말했다.


유수의 국내 대기업들이 역사문제를 통해 신입사원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하고 있다. 은행권 채용에서 최근 인문학이 취업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국민은행은 상반기 신입사원 채용에서 서류전형과 필기시험을 통과한 지원자를 대상으로 통섭역량 면접을 실시한다. 통섭역량 면접에서 지원자들은 인문학 관련 서적을 주제로 토론하게 된다. 또 우리은행은 지원자들에게 자신이 읽은 인문학 서적 3권에 대한 소감과 견해를 자기소개서에 서술하게 했다.


기업들이 입사 지원자들의 역사지식을 비롯해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하고 나선 까닭은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기업환경 속에서 혁신에 대한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은 인문학 공부를 통해 배양될 수 있는 사고능력이 혁신의 밑거름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최근 기업들이 혁신을 강조하는 중”이라며 “시대흐름을 꿰뚫는 안목은 물론 사유능력을 갖춘 인재들이 혁신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기업들은 신입사원 채용에서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하게 된다면 업무에 필요한 글쓰기 능력을 갖춘 인재를 채용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문학 공부의 기본이 되는 글쓰기 능력이 서류작성은 물론 업무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암기식 공부에 익숙한 신입사원들의 글쓰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사내에서 글쓰기 관련 강좌를 진행해도 효과가 미미해 채용과정에서 어느 정도 글쓰기 능력을 갖춘 신입사원을 뽑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채용할 때 인문학을 중시하는 까닭  
▲ 지난달 13일 오전 삼성그룹 신입사원 공개채용 2차 전형인 삼성직무적성검사(SSAT)를 마친 취업준비생들이 서울 강남구 단국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고사장을 나오고 있다.

기업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신입사원 채용뿐 아니라 기존 임직원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는 데도 힘을 쏟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3월부터 12월까지 임직원 대상으로 총 20회의 역사강좌를 진행한 데 이어 올해는 인문학을 주제로 강좌를 진행 중이다.


포스코는 지난달 포항제철소 사옥 내 업무협업 공간인 ‘포디치(Podici)’를 개관해 서로 다른 부서의 현장직원들이 만나 공동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포디치는 포스코와 중세시대 여러 예술가를 후원해온 이탈리아 가문 메디치의 합성어”라며 “직원간 협업을 통해 기존의 틀을 깨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 도출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업들이 채용에 인문학적 소양을 강조하는 데 대해 구직자들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한 취업포털이 최근 신입 구직자 396명을 대상으로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에 반영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설문한 결과 66.9%가 ‘긍정적’이라고 응답했다. 긍정적 이유(복수응답)로 ‘가치관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라서’(50.2%)가 가장 많이 꼽혔고 ‘사고의 깊이를 평가하는 좋은 방법이라서’(49.1%), ‘스펙 인플레가 비교적 덜할 것 같아서’(21.1%), ‘획일화된 평가 방식이 아니라서’(20.4%)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는 데 대해 구직자의 절반 정도인 48.2%는 어려움을 느낀다고 응답했다. 그 이유로는 ‘준비하기 너무 광범위해서’,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서’, ‘지원기업에서 원하는 것을 알기 어려워서’ 등을 답변했다.

전체 구직자 절반은 인문학적 소양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대다수가 ‘인문학 서적 읽기’를 꼽았다. ‘인문학 강연회 참석’, ‘인문학 소양 관련 채용 기출문제 풀기’, ‘인문학 스터디 그룹 참여’ 등의 방법을 활용한다는 응답도 나왔다.

하지만 부담만 늘어났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하반기 대기업 취업을 준비 중인 대학생 강모씨는 “상반기 대기업 인적성 시험에서 역사문제가 다수 출제되면서 수능공부할 때 봤던 인터넷 역사강의을 다시 수강중”이라며 “학점, 영어, 봉사, 공모전에 이어 역사 공부까지 신경써야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대학 4학년인 우모씨도 “그동안 공인영어점수 올리기와 각종 자격증 획득에 집중했는데 지금은 입사 목표로 삼은 기업의 인재상과 인문학적 소양 평가를 집중적으로 알아보고 대비하고 있다”며 “에세이는 상당히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인재를 원하지만 막상 인문학 전공자들을 꺼려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도 나온다.

한 인문대학 교수는 “인문학 열풍이 분다고 하지만 제자들한테 들어보면 대학들은 여전히 경영학이나 경제학 전공자들을 우대하고 있어 이쪽 전공자들에게 인문학 소양까지 요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