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영활동의 공과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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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 중 비교적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동교동계’로 불리던 옛 민주당을 출입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알게 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됐다.
2002년 대선 직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됐을 때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 정치적 문제로 친노 인사들과 충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문제로 민주당이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당선되는 등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군 쪽 지역구에서 4선 의원을 했다. 민주당에서 5번이나 대변인을 맡아 ‘5선 대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으며 의정활동에 상당한 노력을 쏟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NGO모니터단을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가 국정활동을 우수하게 한 국회의원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15년 동안 한 보좌관과 함께 지내는 등 주변 사람을 챙기는 구석도 있다고 알려졌다.
국회의원 시절 헌법연구단체인 미래한국헌법연구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개헌을 추진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참여하는 등 개헌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77.95%를 얻어 당선됐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100원 택시’와 ‘찾아가는 영화관’ 서비스 등 이색공약을 내걸어 눈길을 끌었다. 100원 택시는 전라남도 316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택시를 부르면 그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택시가 운행한 뒤 차액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불하는 방식이다. 현재 화순과 보성에서 시범운행중이다.
이낙연은 전라남도 22개 시군 중 목포, 순천, 여수에만 영화관이 있는 점을 고려해 도지사에 당선된 뒤 2014년 고흥과 장흥에 영화관을 세웠다. 임기 안에 19개 시군에 모두 영화관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또 섬과 농어촌 지역에도 영상장비를 들고 찾아가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행사를 시범운영하고 있다.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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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1979년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했다. 1989년 12월 동아일보 도쿄주재특파원을 맡았다. 1997년 9월 동아일보 편집국 국제부 차장으로 일했다. 1997년 10월부터 1999년 2월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을 맡았다. 1999년 11월부터 2000년 2월까지 동아일보 편집국 국제부 부장으로 일했다.
2000년 5월 제16대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2004년 5월까지 일했다. 그동안 2000년 국회 인사청문회특별위원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2002년 월드컵축구 국회의원연맹 위원을 역임했다. 2000년 12월부터 2001년 11월까지 민주당 제1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았다.
2001년 11월부터 2002년 4월까지 처음으로 민주당 대변인을 맡았다. 2002년 6월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이 됐으며 2002년 12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 당선자대변인으로 일했다. 2004년 국회 건설교통위원회와 운영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2004년 제17대 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2007년 6월까지 일했다. 그동안 2004년 6월부터 2006년 6월까지 민주당 원내대표를 맡았다. 2004년 7월 국회 한일의원연맹 사회문화분과 위원장을 맡았다.
2007년 7월 제17대 중도통합민주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중도통합민주당 최고위원도 맡았다. 2007년 8월 당명이 대통합민주신당으로 바뀌면서 대변인을 맡았다.
2008년 5월 전라남도 담양군함평군영광군장성군에 제18대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로 나가 당선돼 2011년 12월까지 일했다. 2008년 8월부터 2010년까지 국회 농림수산식품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2010년 9월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2010년 10월부터 2011년 5월까지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일했다. 2012년 5월까지 민주통합당 전남도당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5월 제19대 전라남도 담양군함평군영광군장성군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2012년 7월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위원으로 일했다. 2012년 10월부터 2012년 11월까지 18대 대통령선거 민주통합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2012년 11월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했다.
2013년 3월 민주통합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일했다. 2013년 5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제19대 전라남도 담양군함평군영광군장성군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2014년 7월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로 당선됐다.
◆ 학력
영광 삼덕초등학교를 거쳐 1967년 광주북중학교를 졸업한 뒤 1970년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나왔다.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1970년 입학해 1974년 학사로 졸업했다.
◆ 가족관계
농부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0남매 중 3명이 죽었으며 이낙연은 두 형의 죽음으로 장남이 돼 대학교육을 마쳤다.
아내 김숙희는 전주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같은 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미술교육을 전공했다. 이후 서울에서 미술교사로 일했다. 2013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아내와의 사이에서 외아들 이동한을 뒀다. 이동한은 정신과 의사로 일하고 있으며 2013년 11월16일 초등학교 동기동창과 결혼했다.
◆ 상훈
2003년부터 2009년까지 NGO모니터단이 선정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7번 선정됐다. 2011년과 2012년에도 선정돼 총 9번 선정됐다.
2004년 환경실천연합회가 선정한 친환경정책 최우수의원이 됐다. 2006년과 2007년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선정한 국정감사 우수의원이 됐다. 2007년 지역신문협회가 주관한 제4회 의정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뉴스매거진 인물대상에서 의정대상을 탔다.
2009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가 뽑은 우수위원장상을 탔다. 같은 해 한국농민문학회의 농민문화상, 산림환경신문의 산림환경대상, 사랑의 쌀 나눔대상 시상식의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9년과 2010년 매니페스토 약속대상에서 우수상을 2년 연속 시상했다.
2010년 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가 선정한 국정감사 의정활동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2011년과 2012년에 같은 단체에 의해 국정감사 의정활동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됐다. 2011년 법률소비자연맹이 선정한 대한민국헌정상과 사회정의시민행동이 뽑은 공동선의정활동상을 받았다. 2011년 대한노인회가 선정한 노인복지대상과 여성유권자연맹이 뽑은 자랑스러운 국회의원상을 수상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이 선정한 국정감사 최우수의원이 됐다. 2012년 경찰기독신문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한국인 정치부문 대상을 탔으며 그해 국회사무처에 의해 입법 및 정책개발 우수국회의원으로도 뽑혔다.
◆ 상훈
2003년부터 2009년까지 NGO모니터단이 선정한 국정감사 우수의원으로 7번 선정됐다. 2011년과 2012년에도 선정돼 총 9번 선정됐다.
2004년 환경실천연합회가 선정한 친환경정책 최우수의원이 됐다. 2006년과 2007년 바른사회시민회의가 선정한 국정감사 우수의원이 됐다. 2007년 지역신문협회가 주관한 제4회 의정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뉴스매거진 인물대상에서 의정대상을 탔다.
2009년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가 뽑은 우수위원장상을 탔다. 같은 해 한국농민문학회의 농민문화상, 산림환경신문의 산림환경대상, 사랑의 쌀 나눔대상 시상식의 특별상을 수상했다. 2009년과 2010년 매니페스토 약속대상에서 우수상을 2년 연속 시상했다.
2010년 한국문화예술유권자총연합회가 선정한 국정감사 의정활동 우수의원으로 뽑혔다. 2011년과 2012년에 같은 단체에 의해 국정감사 의정활동 최우수의원으로 선정됐다. 2011년 법률소비자연맹이 선정한 대한민국헌정상과 사회정의시민행동이 뽑은 공동선의정활동상을 받았다. 2011년 대한노인회가 선정한 노인복지대상과 여성유권자연맹이 뽑은 자랑스러운 국회의원상을 수상했다.
2012년 민주통합당이 선정한 국정감사 최우수의원이 됐다. 2012년 경찰기독신문이 선정한 대한민국 대한국인 정치부문 대상을 탔으며 그해 국회사무처에 의해 입법 및 정책개발 우수국회의원으로도 뽑혔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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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 (2002/10/24,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대변인 시절 ‘지름길을 몰라 헤매는 사람들에게’라는 촌평에서 민주당 내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을 설득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직관과 단행의 지도자이며, 김대중 전 대통령은 논리와 축적의 지도자다.” (2005/06/15,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민족통합, 국민통합, 지역통합을 위한 국민대토론회’에 참석해 전직 대통령 2명을 평가하며)
“과거의 잘못이 있다면 당장 아픔이 있더라도 깨끗이 털고 가는 것이 우리의 의무다.” (2005/07/28, SBS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중권의 SBS 전망대’에 출연해 ‘안기부 X파일’이 문제가 터졌을 때 김대중 정부와 연관성 문제에 대해 해명하며)
“국민의 선택을 받은 당선자의 발목을 잡거나 괴롭히려는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의심을 묻어둔다고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2007/12/20,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특검법 공포를 요구하며)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최근 이명박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의 불행한 결말은 권력집중과 관계가 있다. 권력분산은 이와 같은 역대 대통령의 비극을 끊을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면 갈등과 미움도 함께 대통령에게 집중된다. 권력분산은 갈등과 미움도 분산시켜 대통령이 국민통합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2013/08/05, 전라남도 도지사 선거 출마를 앞두고 CNB저널과 인터뷰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거론하며)
“박근혜 대통령이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때는 수도권 집중이 너무 심해진다 해서 수도권 공장총량제를 도입했다. 그런데 ‘따님 시대’에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2014/06/25,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로 당선된 직후 동아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언론이나 국회는 비교적 개인플레이가 많은 곳이지만 공직은 팀플레이에 익숙한 문화를 갖고 있다. 어떤 경우에도 실수나 오판의 가능성이 적어 안심할 수 있는 조직임을 깨닫고 있다.” (2014/10/08, 전라남도 도지사 취임 100일을 맞아 CBS 라디오방송 ‘CBS 매거진’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특정지역이 특정 정치세력을 절대 지지하는 일은 영속할 수 없다. 이는 지금의 여당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야당은 인적 쇄신과 내부혁신을 10년 넘게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지지자들의 피로감을 누적시키고 있다. 그러나 매력과 신뢰감을 갖춘 지도자가 출현하고 인물쇄신과 정당운영 혁신을 중단 없이 이룬다면 민심도 상당한 정도까지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2015/04/02, 데일리한국과 인터뷰에서 호남 민심이 새정치민주연합에 호의적이지 않다는 지적을 받자)
◆ 평가
언론인 출신의 정치인 중 비교적 성공적인 길을 걷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동교동계’로 불리던 옛 민주당을 출입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알게 되면서 정치권에 입문하게 됐다.
2002년 대선 직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됐을 때 노무현 정부의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에도 여러 번 정치적 문제로 친노 인사들과 충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문제로 민주당이 논란에 휩싸였을 때도 당선되는 등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군 쪽 지역구에서 4선 의원을 했다. 민주당에서 5번이나 대변인을 맡아 ‘5선 대변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완벽주의자 성향이 있으며 의정활동에 상당한 노력을 쏟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 NGO모니터단을 비롯해 여러 시민단체가 국정활동을 우수하게 한 국회의원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15년 동안 한 보좌관과 함께 지내는 등 주변 사람을 챙기는 구석도 있다고 알려졌다.
국회의원 시절 헌법연구단체인 미래한국헌법연구회 공동대표를 맡았고 개헌을 추진하는 국회의원 모임에 참여하는 등 개헌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의원내각제를 지지하고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득표율 77.95%를 얻어 당선됐다. 당시 전국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을 얻었다.
제37대 전라남도 도지사 선거에 출마했을 때 ‘100원 택시’와 ‘찾아가는 영화관’ 서비스 등 이색공약을 내걸어 눈길을 끌었다. 100원 택시는 전라남도 316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택시를 부르면 그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택시가 운행한 뒤 차액을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불하는 방식이다. 현재 화순과 보성에서 시범운행중이다.
이낙연은 전라남도 22개 시군 중 목포, 순천, 여수에만 영화관이 있는 점을 고려해 도지사에 당선된 뒤 2014년 고흥과 장흥에 영화관을 세웠다. 임기 안에 19개 시군에 모두 영화관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또 섬과 농어촌 지역에도 영상장비를 들고 찾아가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행사를 시범운영하고 있다.
◆ 기타
기독교 신자다.
좌우명은 ‘근청원견(近聽遠見·가까이 듣고 멀리 본다)’이다. ‘뜻은 높게, 몸은 낮게’라는 말도 좌우명으로 사용하고 있다.
휴대전화 연락처에 등재된 사람이 1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36년 동안 계속 취재수첩을 소지하고 다닌다.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당시 담임선생의 도움으로 도시학교에 진학했다.
세상이야기(2000),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2003), 어머니의 추억(2007), 食전쟁 한국의 길(2009) 등 총 4권의 저서를 출판했다.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는 대변인 시절 했던 논평을 모은 책으로 여당과 야당 대변인실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농식품위원장 시절에 했던 축사 등을 모은 책 ‘농업은 죽지 않는다’도 출간했다.
2015년 기준으로 직계가족까지 합쳐 15억5979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부동산이 7억6100만 원이었으며 예금이 약 2억8800만 원을 차지했다. 금융기관 채무는 7300만 원으로 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