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아라비아가 전기차 생산 허브 구축을 위한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있다. 사진은 사우디 현지 인기모델 아반떼(수출명 엘란트라). |
[비즈니스포스트] 현대자동차그룹이 앞으로 사우디아라비아(사우디) 자동차 시장에서 입지를 지키기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사우디 시장에서 내연기관차에서는 일본 업체에 뒤쳐지고 있어 빠르게 커지는 전기차 시장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
하지만 중국업체들이 치고 올라오고 있을 뿐 아니라 사우디 정부도 자국 전기차 브랜드 만들기에 열을 올리고 있어 현대차그룹은 치열한 경쟁을 마주하고 있다.
16일 자동차시장 조사업체 포커스투무브에 따르면 지난해 사우디에서는 62만5915대의 자동차가 판매된 가운데 일본 토요타가 19만7577대를 팔아 31.6% 점유율로 판매 1위를 차지했다.
현대차(8만9015대)는 14.2% 점유율로 2위에 올랐으나 판매량은 토요타의 절반에 못미쳤다.
2019년만 해도 현대차는 사우디 연간 차 판매에서 점유율 23.2%로 토요타(27.7%)와 격차는 4.5%에 머물렀다. 같은 해 기아 점유율(5.5%)까지 합치면 현대차그룹은 토요타에 근소한 차이로 앞섰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토요타와 현대차의 점유율 격차가 17.4%포인트로 크게 벌어졌다. 기아까지 합쳐도 토요타와 현대차그룹의 격차가 12.6%포인트에 이른다.
사우디는 전기차 생산 생태계 구축을 목표로 인프라 구축에 대규모 투자를 진행할 계획을 갖고 있어 앞으로 현지 자동차 시장은 전기차를 중심으로 하는 새 판이 짜여질 것으로 전망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는 최근 사우디가 2030년까지 연간 50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것을 목표로 전기차 제조 인프라 조성 사업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을 세웠다고 보도했다.
이는 앞서 2016년 10월 사우디 정부가 신성장 분야 산업 육성을 통해 석유의존적 경제구조에서 탈피하기 위해 발표한 '비전2030'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에 현대차는 사우디 현지 생산을 통해 토요타 추격의 불씨를 지피는 동시에 태동하는 사우디 전기차 시장에서 교두보를 마련하는 전략을 펼칠 것으로 예상된다.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현대차는 지난해 12월 사우디 산업광물자원부와 사우디 자동차 산업 공동 육성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맺고 현지에 반조립(CKD)공장을 설립할 계획을 세웠다.
현대차와 사우디아라비아는 한국에서 반조립 제품을 수입해 현지공장에서 내연기관차뿐 아니라 전기차를 생산하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사우디 자동차 시장의 3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토요타는 전기차 개발에서 한 발 늦다는 평가를 받는다.
토요타가 전기차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내놓은 브랜드 첫 양산형 전기차 bz4x는 지난해 6월 출시 두 달도 되기 전에 부품 결함으로 리콜에 들어가기도 했다. 현대차가 사우디 현지 전기차 생산에 나선다면 토요타를 추월할 힘을 키울 수 있는 셈이다.
중동지역 맹주인 사우디는 GCC(걸프협력회의) 6개국(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아랍에미리트·카타르·오만·바레인) 가운데 가장 큰 자동차 판매 시장일 뿐 아니라 성장성도 기대되는 시장이다.
시장조사기관 피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자동차시장 규모가 2020년 44만3825대에서 2025년에는 61만6250대로 5년 만에 40% 가까이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는데 지난해 이미 2025년 전망치를 넘어섰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2030년까지 수도인 리야드 내 운행차량의 30%를 전기차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다.
또 모하메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세계 최대 스마트시티인 '네옴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곳에 사용되는 모든 에너지원을 탄소배출 없이 재생에너지를 활용할 계획을 세워 전기차 시장이 빠르게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사우디가 자국 전기차 산업을 키우려는 점은 현대차의 현지 입지 확대 전략에 걸림돌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는 전기차 산업 육성을 위한 투자를 이미 시작했다. 사우디 국부펀드인 공공투자펀드(PIF)는 미국 전기차 제조업체 루시드모터스 지분 약 20억 달러(2조5700억 원)어치를 사들여 최대 주주에 올랐다. 루시드모터스는 2025년 연간 15만 대의 전기차를 사우디 현지에서 생산할 계획을 세웠다.
또 사우디는 지난해 11월 폭스콘, BMW와 협력해 합작법인을 통해 자체 전기차 브랜드 '씨어(Ceer)'를 출시했다. 씨어는 사우디에서 자체적으로 디자인, 제조, 조립되는 전기차를 생산한다.
사우디는 수십년 이상 격차가 벌어진 내연기관차가 아닌 이제 막 커지는 전기차 시장에서 자국 산업을 키우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더구나 지난해 사우디 자동차 연간 판매 10위권 브랜드를 보면 전기차에 강점을 가진 중국 브랜드의 부상이 돋보인다. 2019년에는 10위 창안자동차가 유일한 중국 브랜드였던 반면 4위 창안자동차, 6위 MG, 8위 지리자동차 등 3개의 중국 브랜드가 이름을 올렸다.
현대차그룹으로서는 중국업체와 자국 전기차 산업을 육성하려는 사우디 사이에서 전기차 판매 확대가 힘들어지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일본차와 중국차에 끼여 있는 현대차로서는 앞으로 현지 생산을 비롯한 전기차 출시 전략에 따라 사우디를 비롯한 중동차 시장에서 크게 입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김태민 코트라 리야드 무역관은 사우디 자동차 시장 동향 보고서를 통해 "사우디 내에서 현재 8개의 주요 스마트시티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며 "사우디 정부 주도로 스마트시티 내 친환경 자동차의 활용을 장려하고 있어 추후 전기차 및 수소차의 수입과 관련 기술개발을 통한 현지생산 등이 가속화해 현지 시장 판도에 변화가 커질 것"이라고 바라봤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