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연합의 반도체 지원 법안이 세계 반도체기업들에 큰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사진은 인텔이 독일에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 반도체공장 예상 조감도. |
[비즈니스포스트] 유럽연합(EU)이 430억 유로(약 59조 원)에 이르는 대규모 반도체 투자 지원 정책을 수립했지만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과 비교해 시장의 반응은 크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도체 파운드리 핵심 기업인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투자에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데다 현실적으로 유럽의 지원 계획이 실현될 가능성도 낮다는 점이 배경으로 분석된다.
29일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유럽연합에서 정식으로 도입을 추진하고 있는 반도체 지원법의 중요성이 최근 중국의 정세 불안에 따라 더욱 주목받고 있다.
유럽연합은 최근 주요 소속 국가의 동의를 받아 현지에 반도체공장을 생산하는 기업에 모두 430억 유로의 연구개발과 생산투자 지원금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계획을 확정했다.
글로벌 반도체기업의 유럽 내 공장 투자를 지원하는 정책 논의는 지난해부터 꾸준히 진행돼 왔다. 한국과 대만,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 반도체 수급을 계속 의존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로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가 이어지고 미국과 중국의 무역갈등 및 아시아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로 공급망 차질이 더욱 심각해지며 이런 계획에 탄력이 붙었다.
블룸버그는 최근 중국에서 정부의 코로나19 대응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애플 아이폰 공장 가동에 영향을 미친 일이 유럽의 노력에 당위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바라봤다.
유럽연합은 반도체 지원 정책을 통해 현지에서 반도체 자급체제를 갖춰내고 인공지능 등 첨단 산업에서 주도권을 확보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이는 미국 바이든 정부가 반도체 지원법 시행에 속도를 낸 것과 비슷한 의도를 바탕에 깔고 있다.
유럽연합의 반도체산업 지원 규모는 미국 정부가 내놓은 520억 달러(약 69조)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공격적 지원 계획에도 반도체업계 및 시장의 반응은 비교적 잠잠하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이 의회를 통과할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삼성전자와 TSMC, 인텔이 잇따라 대규모 투자 계획을 선제적으로 내놓고 실행한 것과 비교해 상반된다.
유럽연합 특성상 대규모 정책 수립에 여러 국가의 동의가 필요해 의사결정 체계와 관련한 불확실성이 크다는 점이 이유로 꼽힌다. 법안이 완전히 확정돼 시행되기 전까지는 반도체기업들이 수혜를 볼 수 있을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미국과 달리 유럽에는 첨단 공정을 활용하는 시스템반도체 고객사가 제한적이고 시장 규모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다는 점도 반도체기업들의 투자 결정에 걸림돌로 분석된다.
미국에는 애플을 비롯해 퀄컴과 엔비디아, AMD 등 스마트폰 및 PC, 서버용 고성능 프로세서를 필요로 하는 고객사가 많기 때문에 수요가 어느 정도 보장되어 있다.
반면 유럽 대형 반도체 고객사들은 대부분 자동차용 반도체기업으로 이루어져 있어 필요한 공정 기술의 난이도가 낮고 그만큼 반도체기업들이 수익성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 않다.
유럽 반도체 지원법은 7나노 이하 첨단 미세공정뿐 아니라 28나노급 구형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에도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첨단 반도체공정에 집중하고 있는 삼성전자나 TSMC 등 대형 파운드리업체가 유럽에 반도체공장 건설을 결정할 만한 이유도 그만큼 크지 않다는 의미다.
결국 구형 공정을 활용해 자동차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하는 글로벌파운드리나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인피니온 등 기업이 유럽의 지원법에 수혜를 입을 주요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 삼성전자와 대만 TSMC의 반도체 생산공장. |
삼성전자와 TSMC 모두 유럽에 반도체공장 설립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삼성전자 주요 경영진은 이른 시일에 유럽을 방문해 반도체 관련한 사업 논의를 진행할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TSMC 경영진도 최근 독일 정부와 반도체공장 설립에 관련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하지만 이런 계획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
결국 유럽의 반도체 지원법이 유럽연합에서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려면 삼성전자와 TSMC가 적극적으로 투자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의 확신을 심어줘야 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블룸버그는 유럽의 에너지 부족 위기와 심각한 인플레이션, 경기침체 가능성 등 경제적 불확실성도 유럽연합의 반도체 지원 법안에 약점으로 꼽히고 있다고 보도했다.
반도체 지원법에 들이는 예산이 일부 대형 반도체기업에 돌아가 전반적인 반도체 생태계 활성화로 이어지기 어려울 것이라는 목소리도 일부 국가에서 나오고 있다.
결국 유럽연합의 반도체 지원 정책이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실제로 지원이 결정되고 반도체기업들이 실익을 기대할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인텔은 이미 독일에 200억 유로(약 28조 원)에 이르는 반도체 파운드리공장 건설 계획을 내놓았다. 다만 이런 계획은 독일 정부에서 자체적으로 55억 유로의 지원을 결정한 뒤 추진됐다.
블룸버그는 “유럽연합의 반도체 지원 법안에는 자금 조달과 관련한 구체적 방안이 빠져 있다”며 “유럽연합의 의사결정이 신속하지 않기로 악명이 높은 점도 부정적”이라고 바라봤다.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