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은 싸움이다. 어떤 명칭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그 존재가 결정될 수 있다.
가상화폐 가상통화 암호화폐 등 통일된 용어 없이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4일 가상화폐업계에 따르면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을 통칭할 때 발행구조, 관리주체, 활용범주 등 여러가지 이유와 주장으로 다양한 이름을 쓰며 공식적으로 확정한 용어는 아직까지 없다.
▲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을 통일해 부르는 용어는 아직까지 없다. |
국내 거래소와 민간 투자자들은 가상화폐라는 단어를 주로 쓰고 정부 부처에서는 가상통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미국 등 영어권 국가에서는 암호화폐(cryptocurrency)라는 말을 쓴다.
2012년 유럽중앙은행(ECB)이 내린 가상화폐의 정의에 따르면 △정부가 통제하지 않는 디지털화폐의 한 종류로 △개발자가 발행하고 관리하며 △특정한 가상공간에서만 사용되는 결제수단이다.
예를 들면 싸이월드의 도토리나 게임에서의 골드 등이 있다.
그러나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은 발행 및 관리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이 정의와는 맞지 않는다. 이들은 누군가 발행하기보다는 채굴을 거쳐 생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최근에는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 결제까지 사용처가 확장되면서 원래 정의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정부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을 가상통화라고 지정한 것은 여기에는 내재된 가치가 없고 화폐적 기능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화폐라는 말은 실물이나 실체가 있는 '교환하고 지급하고 유통하는' 수단이라는 뜻이 강하다. 반면 통화는 화폐를 포함해 유통수단 전반을 지칭해 화폐보다 추상적이고 넓은 개념이다. 통화량이라고 말할 때 화폐뿐 아니라 은행의 요구불예금 등을 포함하는 것이 그 예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1월11일 기자간담회에서 가상화폐의 용어와 관련해 “가상화폐는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며 “가상증표로 부르는 게 정확하지 않나”고 말했다. 이는 박 장관이 가상화폐의 화폐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암호화폐라는 용어는 암호를 이용해 새 코인을 만들거나 거래를 안전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매개체가 되는 화폐를 뜻하는 말로 현재 업계에서 통용되는 의미와 가장 비슷하다. 비트코인이나 이더리움 등은 암호를 풀어 답을 찾아내는 채굴 과정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채굴 과정을 거친 채굴자는 일정 단위의 데이터 블록을 보상으로 받는다. 그리고 이 데이터 블록은 발견된 날짜와 이전 블록에 대한 연결망이 있으며 이 블록들이 모여 블록체인을 이룬다.
이와 관련해 김진화 한국블록체인협회 준비위원회 공동대표는 JTBC 뉴스룸에서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는 화폐들을 암호화폐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이 경제적 가치를 보유하고 있느냐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최근 국내 법원에서 비트코인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해 몰수 조치를 내린 첫 사례가 있었다.
수원지법 형사5부(하성원 부장판사)는 1월30일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음란사이트 운영자 안모씨에게 191비트코인 몰수와 6억9570만 원 추징을 명령하고 징역 1년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비트코인은 물리적 실체가 없어도 거래소를 거쳐 환전할 수 있고 가맹점을 통해 재화나 용역을 살 수 있어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와 반대로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등은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은 1월31일 뉴욕타임스에 비트코인과 관련해 ‘거품, 거품, 사기, 문제덩어리’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비트코인은 본질적 가치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비트코인은 자유 지상주의적 이념을 기술 신비주의의 보호막으로 잘 포장한 거품”이라며 “암호를 풀고 코인을 얻는 것은 멋진 묘기이지만 쓸모가 없다”고 평가했다.
크루그먼은 “비트코인의 사용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고 그 가격은 순전히 투기적 성격을 지닌다”며 “현실과 연결고리도 없어 시장 조작에 매우 취약하다”고 비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박소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