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부조리하고 답답하게 느껴질수록 풍자가 ‘뜨는’ 법이다.
고려 말 고려가요나 조선시대 판소리도 지금은 학생들이 배우는 문학적 고전이 돼 있지만 당대엔 부패하고 억압된 현실을 비판하고 조롱함으로써 저항하고 때로 웃음을 통한 위안으로 기능했던 것들이다.
중국 ‘시경’에서 풍자는 이렇게 정의된다. “시에는 육의(六義)가 있는데 그 하나를 풍(風)이라 한다. 상(上)으로써 하(下)를 풍화(風化)하고 하로써 상을 풍자(風刺)한다. 이를 말하는 자 죄 없으며 이를 듣는 자 훈계로 삼을 가치가 있다.”(두산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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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인 김제동씨. |
‘김제동 이승환 설민석.’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혼미한 시대에 더욱 주목받고 있는 이들이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12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대규모 촛불집회 무대에 2차례나 올라 마이크를 잡고 직접 진행을 이끌었다.
그는 “3년 반 동안 이 땅에 진짜 대통령이 누구였을까”라며 운을 떼기 시작해 현 시국에 대한 날선 비판을 이어갔다.
또 헌법 조항들을 하나씩 들어가며 대통령의 잘못을 낱낱이 질타하기도 했다. “정치는 삼류지만 국민은 일류”라는 마무리 발언에 이르기까기 청중들에게까지 열띤 호응을 이끌어냈다.
말솜씨도 워낙 뛰어났지만 때로 선동에 가까운, 또 웃음을 유발하는 풍자로 참가자들의 막힌 가슴을 확 뚫어줄만한 이른바 ‘사이다’ 발언을 쏟아냈다.
김씨 외에 가수 이승환씨도 12일 촛불집회에 참여해 큰 호응을 받았다. 그는 '하야 hye'란 이름으로 히트곡을 개사한 노래들을 부르며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했다. 무대에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대규모 야외 콘서트장을 방불케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이씨는 “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도 오르지 못한, 그래서 마냥 창피한, 그래서 요즘 더욱 분발하고 있는 가수 이승환입니다”라고 소개하면서도 “나는 시민들의 편일 뿐, 정치인들의 편이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역시 대중들의 인기가 ‘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스타강사 설민석씨도 최근 최순실 정국에서 주목을 받은 이들 가운데 하나다. 설씨는 촛불집회에 참가한 것은 아니지만 최근 MBC 인기예능 ‘무한도전’에 출연해 화제에 올랐다.
그는 올해 47세로 아르바이트 삼아 보습학원에서 중학교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해 한국사 최고의 스타강사로 떠올랐다.
그는 방송에서 “요새 우리 국민 여러분이 너무 힘들다”면서 “이 난관을 헤쳐가는 데 고민에 빠져 있는데 해답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끝없는 대화”라고 강조하면서 민심을 거스르는 역사는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점도 내비쳤다.
우회적으로 현 시국을 비판한 셈인데 무한도전이 워낙 인기가 많은 프로그램이기도 해서 파급력이 컸다. 설씨 개인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 그가 4.19 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했던 시민대표 출신 중 한 사람이기도 했던 설송중 전 의원의 아들이란 점도 관심을 모았다.
김제동 이승환 설민석씨 세 사람을 들었지만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으로 촉발된 현 시국에 대해 답답하기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실 이들처럼 대중들의 지지와 인기를 먹고 사는 유명인들의 경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한 용기와 유무형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수도 있는 일이다.
김제동씨만 해도 이날 포털사이트 검색어 상위에 광화문 집회 관련어와 함께 종일 이름이 올라있었다. 또 SNS나 관련 기사 댓글에는 김씨를 옹호하거나 지지를 보내는 이들만큼이나 비난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그가 일류대학 출신이 아니라거나 최근 국회에서도 화제에 오른 영창 관련 발언, 외모 등까지 악성 댓글도 많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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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이승환씨. |
정치적인 이슈를 언급하고 조금이라도 기성정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보내면 ‘좌빨’ 연예인 등으로 찍히기 일쑤인 풍토 때문일 것이다. 문화예술계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의혹까지 나오고 있는 박근혜 정부 아래서야 더 말할 나위 없다.
김씨는 과거 좌파 프레임에 대해 “저에게 사회문제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방향으로 귀결되는데 제가 사회문제를 말하면 정치적이라며 비난받을 때도 있다”며 “하지만 저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은 모두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옳은 말이다. ‘모난 돌 정 맞는’ 분위기가 여전한 우리사회에서 어느 샌가 정치이슈는 무관심해졌거나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에 한참 밀려나 있었다.
물론 모두가 정치에 무관심할 때가 태평성대란 말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태평성대란 불행히도 단 한차례도 실현된 적이 없었을 것이다.
풍자가 됐든 독설이 됐든 정치에 대한 관심은 어느 특정인의 것만이 아니라 시민사회 성원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 이번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가 역으로 일깨워준 교훈이기도 하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