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세에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대표가 됐다. 당시 인천정유를 인수하고 ‘오일뱅크’ 브랜드를 발표하면서 활발한 사업추진력을 보여 ‘불도저‘라는 별명도 얻었다.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주유소 브랜드인 ‘오일뱅크’를 만들고 1996년 한화에너지(현 SK에너지 인천공장) 인수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경영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현대오일뱅크 경영이 악화되고 이 때문에 현대오일뱅크의 주인이 바뀌면서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는 시련을 겪게 됐다.
정몽혁은 영업보다는 기획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은 2009년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하면서 정몽혁을 보좌할 인물로 김영남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정몽혁과 김영남은 각자 대표체제를 구축했다.
현대종합상사의 한 관계자에 의하면 정몽혁은 영업을 강조하는 김영남 사장과 잘 맞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영남 사장은 결국 2011년 말 물러났고 정몽혁은 단독대표를 맡았다. 2012년 3월 현대중공업은 기획통인 김정래 부사장(현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현대종합상사 사장으로 보냈고 정몽혁은 김정래와 각자대표 체제를 구축했다.
정몽혁은 직원들에게 “김정래 사장과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행복한 줄 알라”고 수차례 강조하며 신임을 보였지만 현대중공업은 조선업황 악화로 실적이 악화되자 1년 만에 김정래를 현대중공업 비조선부문 총괄사장으로 복귀시켰다.
정몽혁은 이후 그룹 2인자인 현대종합상사 사장직을 공석으로 두다 올해 4월 ‘영원한 현대맨’ 김원갑 전 현대하이스코 부회장을 현대종합상사, 현대C&F 총괄부회장으로 영입했다.
정몽혁은 범현대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했기에 홀로서기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현대종합상사가 현대중공업과 계열 분리할 때도 최측근 2~3명만이 관여할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정몽혁의 홀로서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몽혁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현대종합상사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종합상사 경영에 대해 노하우를 쌓아왔다는 점은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몽혁은 선택과 집중의 경영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종합상사는 트레이딩 분야와 발전사업을 중심으로 한 신사업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정몽혁은 현대자원개발 설립 및 운영, 우크라이나 고속전동차 유지보수 계약, 괌 전력청 중유공급 계약 등을 진두지휘했다. 정몽혁은 현대종합상사의 해외 영업망을 중동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미주, 구 소련 지방 등으로 확장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반면 현대종합상사의 여전히 높은 범현대가 매출의존도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현대종합상사가 전체 매출에서 현대중공업그룹 관련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만 해도 지난해 말 기준 19%에 달한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9년 캘리포니아 유학 후 한국에 돌아와 극동 정유 부사장에 올랐다. 원래 일본 유학을 원했으나 그를 아낀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만류해 경영 일선에 뛰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현대석유화학 부사장을 거쳐 1993년 현대정유 부사장이 됐다. 1996년 현대석유화학과 현대정유 사장에 올랐다.
1999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현대석유화학 경영권을 내놓았다.
1999년 한화에너지를 인수하고 UAE의 아부다비국영석유투자회사(IPIC)사로부터 외자유치를 성사시켰다. 2000년 1월 인천정유와 함께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해 재계서열 13위의 현대정유그룹을 세웠다.
그러나 외자유치 과정에서 현대정유의 최대주주가 된 IPIC는 정 회장의 경영책임론을 들고 나왔다. 2000년 정유사 담합사건으로 벌금을 받게 되자 IPIC는 외자유치 때 성실히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정몽혁은 결국 2002년 현대정유 회장에서도 물러났다.
정몽혁은 이후 운신의 폭이 대폭 줄었다. 2002년 7월 몇 명의 동료들과 조명기구 제조사 에이치애비뉴앤컴퍼니를 설립하고 현대그룹의 방계계열사에 납품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2005년 정몽혁을 아끼던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부품계열사인 메티아(아주금속)의 대표자리를 내어주며 현대가로 다시 불러들였다.
2009년 정몽혁은 워크아웃을 끝내고 매물로 나온 현대종합상사를 통해 재기를 꾀했다. 그는 범현대가 사촌들에게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하게 도와달라고 요청했고 정몽준 대표 등 범현대가 핵심인사들은 내부의견 조율을 거쳐 정몽혁의 재기를 도와주기로 결정했다.
현대중공업을 필두로 범현대가 컨소시엄은 현대종합상사 인수전에 참여했고 현대종합상사 인수전에 참여하려던 STX와 사모펀드는 범현대가의 결집을 보고 현대종합상사 인수를 포기한다.
현대중공업은 2009년 채권단으로부터 현대종합상사 총 주식의 50%+1주를 2500억 원에 샀다. 현대종합상사는 현대중공업 계열사로 편입됐고 정몽혁은 2009년 12월 현대종합상사 회장에 올랐다.
2015년 10월 현대종합상사의 브랜드·산업유통 부문을 인적분할해 현대C&F를 설립했고 ‘정몽혁 → 현대C&F → 현대종합상사’의 지배구조를 만들었다. 정몽혁은 2015년 12월 현대중공업으로부터 현대C&F지분 12.25%와 현대종합상사 지분 19.37%을 매수했고 2016년 3월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현대중공업과 계열분리를 승인받았다.
◆ 학력
1980년 서울 경복고를 졸업했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수리경제학을 전공해 1989년 학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아버지 정신영씨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다섯째 동생으로 동아일보와 대한일보 기자를 지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생전에 가장 똑똑한 동생이라며 정신영씨를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정신영씨는 1962년 독일 유학 중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장정자씨는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고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장 이사장은 극동유화 대표인 장홍선 회장의 누나다.
누나 정일경씨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블룸버그 대학 회계학과 임광수 교수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사촌 형으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정몽근 현대백화점그룹 명예회장, 정몽진 KCC회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 등이 있다.
이문희 현대SNS 대표와 사이에 자녀로 정현이씨, 정두선씨, 정우선씨를 두었다.
◆ 상훈
1994년 국세청장으로부터 납세풍토기여 표창을 받았다.
1994년 충남도지사로부터 국토대청결 운동에 적극 참여한 공로로 환경보호 표창장을 수상했다.
1996년 회사의 경영성과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대그룹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1997년 34회 무역의 날에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1999년 한국산업영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 상훈
1994년 국세청장으로부터 납세풍토기여 표창을 받았다.
1994년 충남도지사로부터 국토대청결 운동에 적극 참여한 공로로 환경보호 표창장을 수상했다.
1996년 회사의 경영성과를 획기적으로 개선한 공로를 인정받아 현대그룹 최고경영자상을 수상했다.
1997년 34회 무역의 날에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1999년 한국산업영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어록
“새로운 성장동력은 멀리 있거나 생소한 분야가 아니라 지금 하고 있고 가장 잘 아는 분야에서 찾아야 합니다.”(2012년 경영전략회의에서)
“이제 세계는 과거와 같은 고성장을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사업이 어려움에 부딪힐수록 트레이딩 분야를 포함한 지금의 강점을 살리고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진정한 상사맨의 자세” (2012년 초 경영전략회의에서)
“정주영 명예회장께서 수출입국의 큰 과제를 맡겨 출범시키셨던 현대종합상사가 그동안 은행관리와 워크아웃 돌입으로 멀리 떠나 있다가 다시 우리 현대의 품 안으로 돌아왔다. 정주영 명예회장께서 현대종합상사를 설립하신 취지와 경영철학을 바탕으로 상사의 오늘과 미래 모습을 다시 설계해 이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자 한다. 현대종합상사가 우리 현대의 품에 다시 돌아와 시작하는 첫 해인 2010년이 새로운 도약의 원년이다. 정 명예회장의 유지를 받들어 상사를 업계 제1의 기업,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 1위 종합무역회사로 일으켜 세우겠다.” (2010/01/26, 현대종합상사 제2창업 결의대회 직후 임직원과 경기도 하남시 창우동 현대가 선영을 찾아 선친과 큰아버지의 묘소를 참배한 후)
“앞으로는 경영자도 나이와 오너십이 문제가 아니라 경영능력에 따라 냉엄하게 평가받아야 할 것.”(1998/05/11,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 평가
2살 때 아버지를 잃고 젊은 나이에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기에 ‘비운의 황태자’로 불렸다.
32세에 현대정유와 현대석유화학 대표가 됐다. 당시 인천정유를 인수하고 ‘오일뱅크’ 브랜드를 발표하면서 활발한 사업추진력을 보여 ‘불도저‘라는 별명도 얻었다.
국내 정유업계 최초로 주유소 브랜드인 ‘오일뱅크’를 만들고 1996년 한화에너지(현 SK에너지 인천공장) 인수를 주도하는 등 활발한 경영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현대오일뱅크 경영이 악화되고 이 때문에 현대오일뱅크의 주인이 바뀌면서 경영에서 물러나게 되는 시련을 겪게 됐다.
정몽혁은 영업보다는 기획을 중시하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현대중공업은 2009년 현대종합상사를 인수하면서 정몽혁을 보좌할 인물로 김영남 현대중공업 부사장을 사장으로 임명했다. 정몽혁과 김영남은 각자 대표체제를 구축했다.
현대종합상사의 한 관계자에 의하면 정몽혁은 영업을 강조하는 김영남 사장과 잘 맞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김영남 사장은 결국 2011년 말 물러났고 정몽혁은 단독대표를 맡았다. 2012년 3월 현대중공업은 기획통인 김정래 부사장(현 한국석유공사 사장)을 현대종합상사 사장으로 보냈고 정몽혁은 김정래와 각자대표 체제를 구축했다.
정몽혁은 직원들에게 “김정래 사장과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행복한 줄 알라”고 수차례 강조하며 신임을 보였지만 현대중공업은 조선업황 악화로 실적이 악화되자 1년 만에 김정래를 현대중공업 비조선부문 총괄사장으로 복귀시켰다.
정몽혁은 이후 그룹 2인자인 현대종합상사 사장직을 공석으로 두다 올해 4월 ‘영원한 현대맨’ 김원갑 전 현대하이스코 부회장을 현대종합상사, 현대C&F 총괄부회장으로 영입했다.
정몽혁은 범현대가의 지원을 바탕으로 재기에 성공했기에 홀로서기에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다. 현대종합상사가 현대중공업과 계열 분리할 때도 최측근 2~3명만이 관여할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됐다.
정몽혁의 홀로서기는 아직 현재진행형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몽혁은 2010년부터 현재까지 현대종합상사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종합상사 경영에 대해 노하우를 쌓아왔다는 점은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몽혁은 선택과 집중의 경영철학을 강조하고 있다. 현대종합상사는 트레이딩 분야와 발전사업을 중심으로 한 신사업분야에 집중하고 있다.
정몽혁은 현대자원개발 설립 및 운영, 우크라이나 고속전동차 유지보수 계약, 괌 전력청 중유공급 계약 등을 진두지휘했다. 정몽혁은 현대종합상사의 해외 영업망을 중동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미주, 구 소련 지방 등으로 확장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반면 현대종합상사의 여전히 높은 범현대가 매출의존도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현대종합상사가 전체 매출에서 현대중공업그룹 관련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만 해도 지난해 말 기준 19%에 달한다.
◆ 기타
미국유학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일본어와 중국어등 다양한 언어를 습득하길 원했고4장 분량의 편지를 정 명예회장에게 써 일본유학을 하겠다고 설득했으나 정 명예회장은 “일본어는 독학으로도 6개월이면 배운다”며 국내에 들어와 일을 배울 것을 지시했다.
고교시절 국가대표 승마선수를 지낼 만큼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정유 대표시절 국내에서 생소했던 자동차 레이싱 팀과 아이스하키 팀을 창단하기도 했다.
지난해 9억9280만원의 보수를 받았다. 상여 없이 급여가 9억9천만 원, 기타 근로소득이 280만 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