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이웅범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 사장
이웅범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 사장.


이웅범은 1957년 2월10일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반도상사(현 LG상사)에 입사했다.

LG전자를 거쳐 LG이노텍에서 근무하다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2015년 연말인사에서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1983년 반도상사(현 LG상사)에 입사한 뒤 33년째 LG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기술 현장경험을 쌓은 이공계 전문가로 현장감각이 뛰어나고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 ‘야전사령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LG이노텍을 ‘출근이 기다려지는 회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실제 현장에서 LG그룹의 ‘신상필벌’ 원칙을 강조하며 철두철미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실한 직원이 어떤 문제에 몰입하고 고민을 해야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창의적 직원도 될 수 있다는 인재관을 가지고 있다. 업무를 깊이 있게 수행하지 않는 직원에 대해서 스스로에게도 발전이 없으니 지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LG전자에서 일할 때 사업 추진력이 좋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LG전자 휴대전화사업본부 단말생산담당 상무 시절 단말생산기지 통합으로 생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생산 안정화를 달성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LG전자가 ‘초콜릿폰’과 ‘프라다폰’ 등을 히트시켰던 2006~2008년 동안 제품 담당을 맡았다.

2007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을 때 LG전자가 전 세계 최초로 CDMA, GSM, 3G 통합생산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대폰 친환경시스템 도입과 휴대폰 하우징의 주석증착 국산화에도 기여했다.

2010년 LG이노텍 부품소재사업본부장이 된 뒤 고화소 카메라모듈과 반도체 기판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사업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2012년 적자를 내던 LG이노텍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이공계 인재를 중시했던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영철학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뒤 LG이노텍의 14분기 연속 흑자 기록을 세우며 실적 개선에 성공했다.

대표이사 부사장이 된 뒤 7개 국내 사업장을 하루에 2~3곳씩 방문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취임 뒤 1개월 동안의 이동거리만 3만3천 킬로미터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 중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결재와 메일 확인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LG이노텍에 ‘오픈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의문화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임직원이 참석해 최고경영자(CEO)와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의 회의다.

2012년 5월 LG이노텍의 장애인고용 자회사 ‘이노위드’ 설립을 이끌어내는 등 장애인 고용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들어 LG이노텍의 주력 사업분야를 스마트폰용 카메라모듈에서 차량용 카메라모듈과 모터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2014년 6월 멕시코에 세운 차량 전장부품 생산공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LG이노텍은 차량용 부품 사업 호전에 힘입어 2014년 최대실적을 기록했다.

2014년 7월 LG이노텍 중국 옌타이법인 태스크포스팀이 카메라모듈 목표 수율을 달성하자 직접 현장을 방문해 태스크포스팀 직원들과 함께 3박4일 백두산 등산을 하는 등 직원들과 소통을 중시하고 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83년 반도상사(현 LG상사)에 입사했다.

1986년 LG전자로 자리를 옮겨 생산실장, 제조실장, 기획관리팀장 등을 역임했다.

2000년 LG전자 레코딩미디어 사업부장 상무로 선임됐다. 2002년 LG전자 PCB사업부장을 맡았다. 2005년 LG전자 휴대전화(MC)사업본부 단말생산담당 전무로 승진했다.

2006년 LG전자 휴대전화사업본부 생산담당 부사장을 맡았다.

2010년 1월 LG이노텍 부품소재사업본부 본부장이 됐다. 2012년 LG이노텍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았다.

2014년 사장으로 승진한 뒤 현재까지 LG이노텍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2012년 한국전자회로산업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2012년 구미공단에 공장을 둔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실트론, LG이노텍, 루셈을 대표하는 LG경북협의회 회장을 맡았다.

2015년 연말인사에서 LG화학 전지사업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 학력

이웅범은 배문고등학교를 거쳐 1983년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2003년 캐나다 맥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아들 이이경은 2011년 배우로 데뷔했다. 이후 ‘학교 2013’과 ‘별에서 온 그대’ 등 여러 드라마에 나와 얼굴을 알렸다.

◆ 상훈

2007년 ‘전자의 날’ 기념식에서 중국 휴대폰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13년 12월6일 경상북도 구미시가 선정한 ‘2013년 구미시 올해의 최고기업인상’에서 대기업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 상훈

2007년 ‘전자의 날’ 기념식에서 중국 휴대폰 수출 증대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13년 12월6일 경상북도 구미시가 선정한 ‘2013년 구미시 올해의 최고기업인상’에서 대기업 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어록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개인과 조직의 글로벌 역량을 지속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일의 주인과 실행의 주체는 바로 여러분 모두다. 여러분 개개인이 각자 맡은 분야에서 세계 최고수준의 전문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일등 인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스스로 높은 목표를 설정하고 도전하며 빠르고 강한 실행을 통해 높은 성과를 창출하는 인재를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 (2012/01/02, LG이노텍 대표이사 부사장이 된 뒤 첫 신년사에서 회사의 실적부진을 타개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고부가 제품 시장에서도 점차 치열한 가격경쟁이 펼쳐지면서 체질 강한 소수기업들만 살아남을 것이다.” (2012/01/29, 한국전자회로산업협회 부회장으로 일하던 시절 국내 산업판도를 진단하면서)

“그만뒀을 때 LG이노텍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공헌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2012/02/28, LG이노텍 사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통통토크’ 현장에서 최고경영자로서 꼭 해보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대답하며)

“지금은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면서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 시기다. 이를 통해 치열하면서 활력 넘치는 조직문화를 구축하고 싶다.” (2012/02/28, 직원들에게 자신을 소개하는 ‘통통토크’ 행사장에서 어떤 회사를 만들고 싶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며)

“지금까지 스마트폰시장이 견고했지만 곧 포화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저가폰 위주의 가격싸움이 전개될 것이다.” (2012/10/09,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2012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대전(KES)’에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충분한 휴식이 있어야 아이디어를 얻고 사물을 보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 정규 업무시간에 일을 끝내고 일찍 퇴근해 자기계발과 재충전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중요하다.” (2014/07/30, LG이노텍 사보에서 근로문화 개선의 필요성을 밝히며)

“우리의 성과는 갑자기 경영환경이 좋아져 운 좋게 나온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어려운 환경에서도 집요하고 치열하게 사업체질 강화활동에 매진해 온 결과다. 하지만 상반기 실적에 도취해 ‘이 정도면 되겠지’라는 자만심을 가지는 순간 우리가 힘들게 쌓아온 성과는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하반기에도 ‘침과대단(枕戈待旦, 창을 베고 자면서 아침을 기다린다)’의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 (2014/08/04, LG이노텍이 역대 최대수준의 영업이익을 낸 뒤 임직원들에게 보낸 최고경영자(CEO) 메시지에서)

“차량용 전장부품은 LG이노텍이 보유한 기술과 제품을 기반으로 확실하게 성과를 낼 수 있는 신사업이다. 내년 매출 1조원을 넘길 것으로 확신한다.” (2015/02/27,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소재부품 분야의 핵심기술과 사물인터넷, 스마트카 등 융복합시장을 빠르게 선점하겠다. 시장을 선도할 수 있도록 원천기술을 적극적으로 확보해 신사업을 육성하는 데에도 나서겠다. 이를 통해 5년 안에 LG이노텍 매출을 10조 원으로 끌어올리겠다.” (2015/03/19, 제39기 LG이노텍 주주총회에서)

◆ 평가

1983년 반도상사(현 LG상사)에 입사한 뒤 33년째 LG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기술 현장경험을 쌓은 이공계 전문가로 현장감각이 뛰어나고 의사결정 속도가 빨라 ‘야전사령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LG이노텍을 ‘출근이 기다려지는 회사’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실제 현장에서 LG그룹의 ‘신상필벌’ 원칙을 강조하며 철두철미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성실한 직원이 어떤 문제에 몰입하고 고민을 해야 창의적 아이디어가 나오면서 창의적 직원도 될 수 있다는 인재관을 가지고 있다. 업무를 깊이 있게 수행하지 않는 직원에 대해서 스스로에게도 발전이 없으니 지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LG전자에서 일할 때 사업 추진력이 좋고 단기간에 성과를 내는 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LG전자 휴대전화사업본부 단말생산담당 상무 시절 단말생산기지 통합으로 생긴 문제를 빠르게 해결해 생산 안정화를 달성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LG전자가 ‘초콜릿폰’과 ‘프라다폰’ 등을 히트시켰던 2006~2008년 동안 제품 담당을 맡았다.

2007년 동탑산업훈장을 받았을 때 LG전자가 전 세계 최초로 CDMA, GSM, 3G 통합생산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대폰 친환경시스템 도입과 휴대폰 하우징의 주석증착 국산화에도 기여했다.

2010년 LG이노텍 부품소재사업본부장이 된 뒤 고화소 카메라모듈과 반도체 기판 등 고부가가치 제품 중심의 사업을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2012년 적자를 내던 LG이노텍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이공계 인재를 중시했던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경영철학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뒤 LG이노텍의 14분기 연속 흑자 기록을 세우며 실적 개선에 성공했다.

대표이사 부사장이 된 뒤 7개 국내 사업장을 하루에 2~3곳씩 방문하며 현장의 목소리를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취임 뒤 1개월 동안의 이동거리만 3만3천 킬로미터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동 중에도 스마트폰을 이용해 결재와 메일 확인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LG이노텍에 ‘오픈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의문화를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직급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임직원이 참석해 최고경영자(CEO)와 의견을 교환하는 방식의 회의다.

2012년 5월 LG이노텍의 장애인고용 자회사 ‘이노위드’ 설립을 이끌어내는 등 장애인 고용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들어 LG이노텍의 주력 사업분야를 스마트폰용 카메라모듈에서 차량용 카메라모듈과 모터 등으로 확대하고 있다. 2014년 6월 멕시코에 세운 차량 전장부품 생산공장이 가동을 시작했다. LG이노텍은 차량용 부품 사업 호전에 힘입어 2014년 최대실적을 기록했다.

2014년 7월 LG이노텍 중국 옌타이법인 태스크포스팀이 카메라모듈 목표 수율을 달성하자 직접 현장을 방문해 태스크포스팀 직원들과 함께 3박4일 백두산 등산을 하는 등 직원들과 소통을 중시하고 있다.

◆ 기타

좌우명은 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다. 자신이 어디에 처해 있든 마음먹기에 따라 주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1주일에 한 번 이상 임직원들과 점심식사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생일을 맞이한 직원들에게 직접 축하 메일을 보내기도 한다.

지방사업장을 다닐 때 현장 개발부서나 생산부서에게 생산성을 증대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은 뒤 실제 목표를 달성했을 경우 수백만 원 수준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LG이노텍과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가 자매결연을 맺었을 때 학생과 결연을 맺고 매월 15만 원씩 장학금을 지원했다.

2012년 LG이노텍에 8시30분 출근-5시30분 퇴근 제도를 도입했다. 6시30분 이후에도 야근이 잦은 부서를 인사팀 점검리스트에 올리는 등 ‘칼퇴근’을 장려하는 문화를 만들었다.

2012년 7월 LG이노텍의 미혼 남성 직원을 위해 1대1 만남을 주선하는 ‘더 로맨틱’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2013년 3월 남대호 LG이노텍 오산 인사노경팀 대리가 이 프로그램을 통해 결혼하자 본인의 차량을 웨딩카로 제공하기도 했다.

2014년 연봉 10억2400만 원을 받았다. 급여가 9억2500만 원, 상여금이 9900만 원이었다.

아들 이이경이 배우가 되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이경은 영어학원과 카페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연기학원비를 벌어 데뷔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이경이 2012년 영화 ‘백야’에서 동성애자 역할을 맡았을 때 의견 차이를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