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은 창립 80주년도 조용히 보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2014년 병상에 오른 뒤 삼성그룹 계열사들은 창립일 기념식과 신년하례식 등 행사를 거의 열지 않고 있다.
총수 부재로 무거운 분위기가 이어지는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삼성그룹이 창립 80주년을 맞은 22일에도 각 계열사들은 지난 역사를 돌아보고 임직원들에 대표이사들의 격려사를 전하는 짧은 사내 방송을 방영하는 데 그쳤다.
이런 상황이 4년째 지속되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 과거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에 필적하는 확실한 미래 비전과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그룹은 지난 80년 동안 기록적 성장을 보이며 국내 최대 기업집단으로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위치에 올랐고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상위 기업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초석을 닦아야 하는 앞으로의 80년이 지금의 삼성에는 더 중요하다.
이 부회장은 이 회장의 와병 뒤 적극적 사업재편과 구조조정으로 미래 성장에 역량을 집중하는 체질 개선을 주도했고 선진 기업문화를 삼성그룹 계열사에 자리잡도록 하는 데도 힘썼다.
삼성그룹이 경제 성장에 기여한 눈부신 성과에도 선대 경영인 시절부터 이어졌던 오너일가의 권한 집중과 정경유착 논란, 무노조 원칙 등이 삼성에 대한 평가절하를 이끄는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
최근에도 삼성그룹은 60대 이상 경영진이 대부분 퇴진하고 오너일가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이사회 권한 강화 등 변화를 도입하는 등 쇄신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 부회장이 이런 변화에 더욱 속도를 붙이는 데 삼성그룹의 과거가 발목을 잡고 있다.
정경유착이라는 흑역사가 결국
박근혜 게이트 사태로 이어져 이 부회장이 1년 동안 구속 상태에 놓이는 초유의 사태로 번졌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이 부회장은 삼성의 대대적 쇄신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두고 있었다”며 “최근 일련의 사태가 없었다면 훨씬 크고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의 지난 80년은 이 부회장에게 한편으로 위대한 유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청산해야 할 무거운 짐이다.
최근 삼성그룹을 둘러싸고 논란이 되는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과 삼성물산 합병,
박근혜 게이트 사태가 모두 이 부회장이 ‘과거의 삼성’을 물려받는 경영권 승계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항소심 재판에서
이병철 창업주와 이 회장 등 선대 경영진을 따라잡는 데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는 개인적 감정을 호소하기도 했다.
삼성그룹 회장에 올라 후계자로 명맥을 이어가기보다 순수하게 경영능력으로만 인정받으려 했다며 미래의 삼성을 향한 변화와 쇄신에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이 부회장은 아직 재판을 앞두고 있지만 새로운 삼성을 만들겠다는 변화 가능성을 증명할 기회는 충분히 남아 있다. 삼성그룹을 둘러싼 차가운 여론을 신뢰로 바꿀 수 있는 여지도 남아 있다.
삼성을 바라보는 엇갈린 시선 가운데도 ‘
이재용의 삼성’은 지난 80년 동안의 삼성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권오현 삼성전자 회장은 창립 80주년 기념 방송에서 임직원을 격려하며 “미래의 ‘100년 삼성’을 준비하고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이 다시 한 번 변신할 기회”라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용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