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올해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당시는 12.3 계엄사태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한덕수 ‘전’ 국무총리의 권한 정지로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을 때다.
최상목 전 부총리는 2024년 말 윤 전 대통령의 탄핵사건을 심리할 헌법재판관 임명을 결정해 국민의힘 등 윤 전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쪽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창용 총재는 경제와 정치의 분리를 강조하며 이례적으로 신년사에서까지 최 전 부총리의 편을 들어준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4개월 뒤, 이 총재의 말은 결과적으로 신뢰를 잃었다.
최 전 부총리가 전날 국회 본회의에 탄핵안이 상정된 뒤 전격 사퇴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의 탄핵은 물론 최 전 부총리의 사퇴 역시 경제보다 정치를 고려한 결정으로 평가된다. 대법원이 이재명 민주당 대선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에 돌려보낸 뒤 전격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이에 경제시스템이 정치에 영향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시장에 다시 엄습하고 있다.
가뜩이나 현재 한국 경제는 좋지 않은 상황이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전날 올해 경제성장률을 0.7%로 직전 전망보다 1%포인트 낮춰 잡았다.
수출이 4월에도 증가세를 이어갔다지만 미국을 향한 수출은 1월 이후 3개월 만에 다시 마이너스로 돌아서며 미국 관세 우려를 키웠다.
이창용 총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F4(Finance4)로 불리는 최 전 부총리와 이 총재, 김병환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12.3 계엄사태 이후 수시로 ‘거시경제· 금융현안간담회’, 이른바 F4 회의를 열고 머리를 맞댔다.
한국의 정치 상황은 혼란 속에 있지만 경제시스템은 이와 무관하게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수없이 강조하며 국내외 주요 투자자들을 안심시켰다.
이들의 기민한 움직임은 실제 외환, 주식, 채권시장의 안정적 흐름에 기여하며 효과를 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누구보다 F4가 활발히 움직여야 한다.
대선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후보의 무죄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히고, 기존 행정부의 대통령 권한대행이 대선 출마를 위해 사퇴하고, 뒤이어 권한대행을 맡을 이가 탄핵소추 위기에 전격 사퇴하는 불투명한 정치 환경 속에서도 경제시스템이 정치와 독립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2일 오전 긴급 F4 회의가 열린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 일 것이다.
김범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직무대행이 주재한 이번 회의에서 F4는 정치적 불확실성이 금융시장에 주는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24시간 대응체계를 지속해서 가동하기로 했다.
최 전 부총리가 갑자기 사라진 만큼 김범석 부총리 직무대행이 이날 회의를 주재했다지만 연륜과 무게감 등을 놓고 볼 때 앞으로 F4 회의에서 이 총재의 역할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총재는 6월 새 정부 출범 이후 F4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을 사람으로 꼽힌다. 한국은행 총재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 이후 정권 교체에도 임기를 보장 받았다. 이 총재는 2022년 5월 4년 임기를 시작해 내년 5월 임기가 끝난다.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이 총재 본연의 역할이기도 하다.
한국은행은 한국의 중앙은행으로 물가안정을 위해 정치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율적 통화정책 집행을 목표로 한다. 이는 한국은행 총재의 임기 보장 이유이기도 하다.
‘이환위리(以患爲利).’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로 ‘근심을 이로움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이 총재는 올해 신년사에서 이환위리를 들어 지금의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지금 한국 경제는 어느 때보다 통상과 환율 불확실성이 크고 이에 이 총재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근심이 클 수밖에 없다. 근심에서 이로움을 찾아내는 책임감과 지혜가 필요할 때다.
이 총재가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진정으로 “우리 경제시스템이 정치 프로세스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출발점”을 만들기를 바란다. 이한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