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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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신규 손오공 회장.
최신규는 1956년 1월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시절을 보냈다.
집안 형편으로 인해 초등학교 3학년에 중퇴했다. 폐건전지를 가지고 놀다가 장난감으로 만들 정도로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13세부터 금은 세공기술과 주물기술을 배웠다. 셋째형과 수도꼭지를 만드는 '협성공업'을 세웠다. 그 뒤 ‘서울다이캐스팅’을 설립해 야외용 가스레인지와 녹즙기 부품을 생산했다.
장난감 자판기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으면서 완구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서울화학’이라는 작은 장난감 공장을 세워 연구한 지 8개월 만에 손에 묻어나지 않으면서도 독성없는 끈끈이를 발명해 40억 원을 벌었다. 장난감 자동판매기사업에도 나서 큰 수익을 냈다.
손오공을 설립한 뒤 일본 2위 완구업체인 다카라를 찾아가 끈질기게 매달린 끝에 기술제휴를 맺었다. 신개념 팽이 장난감인 '탑블레이드'로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장난감 제조개발 회사인 ‘초이락컨텐츠팩토리’를 세우고 개발에 집중했다.
승승장구하던 손오공은 모바일과 온라인 게임시장의 성장으로 완구시장이 불황에 들어서면서 적자로 전환됐다.
최신규는 손오공 대표이사에서 물러난 뒤 신제품 개발에 집중했다. 그 결과 합체로봇 ‘헬로카봇’, 자동차와 변신로봇, 카드게임을 결합한 ‘터닝메카드’를 내놓으면서 손오공은 매출과 영업이익이 크게 늘어났다.
최신규는 현재 손오공 회장을 맡아 완구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
- 경영활동의 공과
- 비전과 과제/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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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업계에서는 ‘장난감 대통령’으로 불린다. 1세대 콘텐츠 리더라고도 불린다.
콘텐츠사업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의 놀이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양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성공을 하기 위한 요건으로 학벌과 학교 간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견을 깨고 ‘무학(無學)’으로 성공을 이룬 CEO로도 잘 알려져있다.
터닝메카드의 성공으로 일본 완구회사가 점령했던 국내 완구시장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평가받는다. 손오공의 '터닝메카드'는 일본 완구회사인 건담의 '요괴워치'의 판매량을 넘어섰고 비성수기에 상관없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창의력과 기술력을 주특기로 내세운다. 자서전에서 ‘돈을 버는 기업가가 아니라 창의적인 기업가로 남고 싶다’는 경영철학을 밝혔다. 그는 아이들의 행동과 표정,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노는지, 어디에 흥미를 보이는지 반복적으로 관찰하면서 어떤 제품을 만들지 상상한다고 한다.
‘아이디어맨’으로 수도꼭지에서 야외용 가스레인지, 그리고 각종 완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금까지 1천 여 개의 제품을 만들었다. 따낸 특허만도 300여 개라고 한다. ‘항상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숱한 수난을 겪으면서 소통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아서 회사를 성장시켰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손오공은 연속으로 적자를 내며 자금난에 시달렸으나 2014년 4월 손오공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장난감 개발에만 몰두해 터닝메카드 개발에 성공했다.
손오공은 2015년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다. 손오공은 지난해 매출 1250억 원, 영업이익은 104억 원을 거뒀다. 터닝메카드 매출이 손오공 전체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 사건사고
- 경력/학력/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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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력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금세공사로 일했다.
1974년 셋째형과 함께 수도꼭지 제조업체인 '협성공업'을 세웠다. 이후 셋째형으로부터 독립해 녹즙기 부품을 생산했으나 수익이 크게 나지 않았다.
1985년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던 중 장난감 자동판매기를 만들어 달라는 전화를 받고 장난감 업계에 발을 들였다. '서울화학'이라는 회사를 세워 독성없는 끈끈이 개발에 성공해 40억 원가량을 벌었다. 이 돈을 창업자금으로 1992년 손오공을 설립했다.
그 뒤 26억원을 투자해 만든 만화영화 ‘영혼 기병 라젠카’가 반응이 좋지 않아 장난감 판매를 포기했다. 이어 ‘붐이 담이 부릉부릉’ ‘하얀 마음 백구’는 만화영화로는 성공을 했지만 완구시장에선 겨우 적자를 면했다.
이런 실패를 겪으면서 ‘그레이트 다간’, ‘탑블레이드’ 등을 성공시켜 완구업계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손오공이라는 회사이름은 손오공의 여의봉처럼 재미있는 요술을 부리는 장난감을 제작해야겠다는 뜻에서 비롯됐다.
2001년 신개념 팽이 ‘탑블레이드’로 인기를 끈 뒤에는 크게 인기를 얻는 상품을 만들지 못했다.
최신규는 완구 개발에 전념하고자 개인소유의 건물과 집을 담보로 200억 원을 대출받아 2007년 초이락컨텐츠팩토리를 만들었다.
초이락컨텐츠팩토리는 제품의 기획과 생산을 맡는 개인회사다. 이 회사를 통해 터닝메카드 애니메이션 제작에 80억 원, 완구 개발에 30억 원을 투자했다.
또 애니메이션 제작 전담을 위한 초이랩과 PC방 유통사업을 위한 자회사 손오공아이비도 운영하고 있다. 손오공아이비는 로보트 태권V 등 국내외 수많은 캐릭터의 상품화계획과 세계적인 게임사 블리자드의 ‘워크래프트3’,‘스타크래프트2’의 국내유통을 맡고 있다.
2014년 8월과 12월에 각각 '헬로 카봇'과 '터닝메카드'를 탄생시켰다. 터닝메카드는 세계 첫 자동 변신로봇으로 모바일 연동 완구였다. 터닝메카드는 애니메이션의 제목이자 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로봇 변신 자동차 이름이다.
최신규가 2014년 경영에서 물러난 후 손오공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전환해 완구유통만 맡고 있고 제품개발과 생산은 초이락컨텐츠팩토리에서 맡고 있다.
◆ 학력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3학년에 중퇴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 육성회비를 내기 힘들었고 이사를 간 뒤 전학신고를 하지 않아 중퇴 처리되었다고 한다.
한양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부인 이희락씨와 사이에 아들 최종일 초이락컨텐츠팩토리 대표를 두고 있다.
◆ 가족관계
부인 이희락씨와 사이에 아들 최종일 초이락컨텐츠팩토리 대표를 두고 있다.
-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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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규모가 작다고 안정만 추구하고 연구개발이나 혁신을 주저한다. 그러니 큰 규모의 기업이 나올 수 없고 자기만의 콘텐츠가 없으니 트렌드를 주도하기보다는 쉽게 휩쓸리는 악순환이 생겼다.” (2016/04/04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원하는 제품을 사주기 위해 줄 서 있는 부모의 모습은 아이들에겐 좋은 추억거리.” (2016/04/04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한국에도 자랑스러운 완구가 있다는 걸 세상에 널리 알리고 싶다.” (2016/01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손오공의 완구 사업을 기본으로 하고 콘텐츠 사업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회사를 발전시킬 것이다.” (2014/08/26, 손오공이 신사업으로 ‘헬로카봇’과 ‘터닝메카드’ 등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면서)
"제 인생 이야기를 담기 위해 시작한 글이 1년 6개월이 지난 뒤 나오게 됐다. 책 속의 저의 모습을 통해 무학인 저도 이렇게 해왔는데 많이 배운분들이 더 큰일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사업을 한지 40년 가까이 됐군요. 지금까지 앞만 보고 살아왔지만 이제 일과 인생의 전환점에 놓인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지켜봐 주십시오." (2011/09 자서전 ‘멈추지 않는 팽이’를 출간하면서)
“삼국지 고사를 보면 유비가 관우와 장비를 잃고 분노에 휩싸여 원수를 갚겠다고 하다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다. 리더는 힘든 일이 있더라도 빨리 잊고 긍정적으로 사업을 해야 한다.” (2011/09 자서전 ‘멈추지 않는 팽이’에서)
"새로운 희망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멈추지 않고 나아갈 길을 스스로 찾아다닌다는 것이다. 사업을 해오다 배신과 사기도 당해봤다. 그러나 좌절 하지 않았다. 좌절이란 제 사전에 없는 단어죠. 인생은 진행형이기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꼭 기억해 주십시오. 멈추지 않는 팽이처럼 말이죠." (2011/09 자서전 ‘멈추지 않는 팽이‘를 출간하면서)
“콘텐츠의 미래는 장난감, 게임, 애니메이션 산업의 융합이다. 온라인 게임도 오프라인으로 건강하게 나올 수 있는 출구를 만든다면 유해성 논란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2011/09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피노키오를 만든 제페토 할아버지 기억하세요? 제페토가 인생의 최대 걸작인 피노키오를 만든 건 머리 하얀 할아버지가 된 뒤였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되고 싶어요. 머리가 굳어 더 이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현역으로 남아 연구할 거다. 제 인생의 최대 걸작은 한참 뒤에 나올 테니까요. " (2010/05,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독성물질 시비가 벌어지고 있던 이 제품을 안전하게 완구로 상용화하면 크게 히트를 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2006/1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사실 전 사업에 미쳤었요. 한시라도 빨리 사업기반부터 닦아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겉으로 보면 편하게 보이는 일일지라도 고생아닌 것이 어디있겠어요? 다만 전 제일을 고생이라기보다는 재미로 받았들였기에 성공할 수 있었죠." (2004/02 한 매체와 인터뷰에서)
◆ 평가
업계에서는 ‘장난감 대통령’으로 불린다. 1세대 콘텐츠 리더라고도 불린다.
콘텐츠사업은 인간의 감성에 호소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지론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의 놀이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한양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기도 했다.
성공을 하기 위한 요건으로 학벌과 학교 간판을 중요하게 여기는 편견을 깨고 ‘무학(無學)’으로 성공을 이룬 CEO로도 잘 알려져있다.
터닝메카드의 성공으로 일본 완구회사가 점령했던 국내 완구시장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평가받는다. 손오공의 '터닝메카드'는 일본 완구회사인 건담의 '요괴워치'의 판매량을 넘어섰고 비성수기에 상관없이 꾸준히 팔리고 있다.
창의력과 기술력을 주특기로 내세운다. 자서전에서 ‘돈을 버는 기업가가 아니라 창의적인 기업가로 남고 싶다’는 경영철학을 밝혔다. 그는 아이들의 행동과 표정, 아이들이 무엇을 가지고 노는지, 어디에 흥미를 보이는지 반복적으로 관찰하면서 어떤 제품을 만들지 상상한다고 한다.
‘아이디어맨’으로 수도꼭지에서 야외용 가스레인지, 그리고 각종 완구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금까지 1천 여 개의 제품을 만들었다. 따낸 특허만도 300여 개라고 한다. ‘항상 어떻게 하면 조금 더 낫게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작은 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숱한 수난을 겪으면서 소통과 신뢰를 포기하지 않아서 회사를 성장시켰다. 2013년부터 2014년까지 손오공은 연속으로 적자를 내며 자금난에 시달렸으나 2014년 4월 손오공 대표이사에서 물러나 장난감 개발에만 몰두해 터닝메카드 개발에 성공했다.
손오공은 2015년 사상 최대의 실적을 냈다. 손오공은 지난해 매출 1250억 원, 영업이익은 104억 원을 거뒀다. 터닝메카드 매출이 손오공 전체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 기타
터닝메카드는 어릴 적 어머니가 장사하던 시장에서 새가 부리로 종이쪽지를 뽑아주는 새점(鳥占)을 보고 착안했다고 한다. 용이나 문어 같은 장난감을 접어서 자동차 모양으로 만든 뒤 바닥에 굴리면 이 차가 자석 카드를 물며 원래 캐릭터로 변신하는 원리다.
2011년 자서전 형태의 경영에세이 ‘멈추지 않은 팽이’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