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Who Is ?]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은 1944년 6월 13일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에세이 경시대회에서 수상하면서 미국을 방문해 존 F.케네디 대통령을 잠시 만난 것을 계기로 외교관이 되기로 결심했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합격했다.

외무부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1차관보 등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외교통상부 차관과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다 국제연합 사무총장에 당선됐다.

5년 동안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임한 뒤 연임에 성공했다.

여당과 야당의 러브콜을 받으며 대선 후보로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한국인으로서 처음 유엔 사무총장이 됐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외모와 소탈한 성격을 지녀 대인관계가 원만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일처리에는 빈틈이 없다. 겸손하다고도 평가받는다.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성실성을 가지고 원칙에 입각해서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 자기를 내세우기보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설득하는 리더십으로 인정받았다. 솔선수범해서 유엔이라는 조직을 이끌어왔다.

따뜻한 카리스마와 집요한 추진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와 함께 일해 본 적이 있는 외교관들은 누구나 그가 상대에게 정상을 다해 신뢰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집요함으로 옮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해 결국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반기문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선에 패배한 측이 승복하지 않아 내전 상황으로 번졌을 때 문제에 개입해 승리한 측이 집권하도록 문제를 푸는 데 기여했다.

또 미얀마 군부를 끊임없이 압박해 올해 군부가 약속한 7단계의 민주화 과정 가운데 하나인 '국민총선'을 치르게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그에 대해 “강하고 일관된 해법을 밀어붙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하는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라고 말했다.

자중자애를 인생의 살아온 방법으로 꼽는다. ‘머리는 항상 구름 위에 두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 발까지 떨어져 버리면 넘어진다’를 신념으로 간직해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제도 비서관으로 인사정책에 관여했던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이 참여정부의 인사 뒷얘기와 주요인물 20인에 대한 평가를 담은 저서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에서 반기문의 운명을 '운칠기삼(運七技三·운이 7할이고 기가 3할이라는 뜻)'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반기문의 이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흘린 땀 못지 않게 고비마다 절묘하게 행운이 뒤따랐다고 평가했다.

2016년 방한하는 것을 두고 대권주자가 되기 위한 행보라는 시각이 있으나 반기문은 이에 대해서 부정했다. 그는 방문목적에 대해 “유엔의 목적에 의한 것으로 정치인을 만날 계획이 없으며 가족과 만나 조용히 있다가 올 것”이라고 밝혔다.

2016년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코노미스트는 "반 총장은 (유엔 내부의) 행정 능력이나 (유엔 밖의) 통치 능력 모두에서 실패한 총장으로 평가받고 있다"며 "코피아난 등 전 총장들에 비해 강대국들에 맞서는 것을 싫어했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말을 잘 못하고 절차에만 집착하고 현안에 대한 빠른 대처 능력이나 업무 깊이도 부족하다. 임기 9년이 지났는데도 '점령' 같은 논란이 되는 용어를 쓰는 실수도 했다" 며 "가장 활기 없는, 최악의 총장 중 한명"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그가 2016년 3월 북아프리카 순방 중 알제리 남서부 틴두프 지역의 스마라 난민촌을 방문한 자리에서 모로코가 서사하라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두고 비판한 것으로 모로코의 격노를 샀다.

이코노미스트는 또 "반 총장은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 5개국이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무난한 사람이었다"면서 그가 UN 수장으로 10년이나 임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미국과 러시아 등 UN 상임이사국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무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도 반기문이 중요한 국제 현안에 대해 제때 필요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힘없는 관측자"라고 비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가 국제문제에 있어 두드러지는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실질적인 힘이 없는 유엔 사무총장의 근본적인 한계를 간과한 채 그를 너무 비난하고 있다는 동정론도 나왔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치고 인도로 부임했다. 워싱턴이 아닌 인도 뉴델리로 간 이유는 위험비 수당을 벌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고 싶은 이유였다. 1972년 주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1976년 주인도 대사관 1등 서기관 등을 거쳤다.

당시 주인도 대사였던 노신영 전 국무총리가 그의 능력을 높이 사 1985년 그를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했다.

그 뒤 반기문은 승승장구해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공사를 역임했다.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국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1996년 11월 외교안보수석를 맡았다.

1998년 외무부 대사가 됐다. 같은 해 주오스트리아 대사관 대사 겸 주비엔나 국제기구대표부 대사를 맡았다.

1999년 1월부터는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기구 준비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2000년 제2대 외교통상부 차관으로 발탁되었으나 2001년 한-러 정상회담 합의문에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 조약이 들어가는 실수로 외교부 차관에서 물러났다.

2001년 9월 한승수 당시 외교부 장관이 겸임했던 제 56차 유엔총회의장을 보조하는 비서실장으로 사실상 ‘좌천’됐다.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9.11사건이 발생해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그리고 이견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와대 외교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을 맡았다.

반기문은 초보 외교관 시절부터 틈틈이 유엔 업무를 맡았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주UN 1등서기관을, 1991년 외무부 UN 과장을 거쳤다. 2001년 유엔총회의장을 겸임한 한승수 외교통상부 장관을 보조해 비서실장 및 유엔본부 대사로 활동했다.

2006년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유엔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했다. 결국 수차례 예비투표를 거쳐 최종 후보로 결정됐고, 총회의 표결을 거쳐 2006년 10월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2011년 6월에 반기문 사무총장 연임 추천 결의안에 대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었다. 2012년 1월부터 두번째 사무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 학력

충주중학교, 충주고등학교를 나왔다. 중학교 3학년 이후 미군부대에서 반출된 타임(Time)을 사서 영어를 배웠다.

충주고 2학년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부상으로 비스타(VISTA, Visit of International Student to America)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했다. 한 달간 미국 연수 및 봉사활동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1970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 수석을 차지했다.

외교관 재직 중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했으며 1985년 4월 졸업하여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8년 서울대학교 명예 외교학박사학위와 페어리디킨슨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대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0년 난징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및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외교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5년 5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여성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6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졸업식에서 법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또 같은 해 미국 로욜라 메리몬트대학교(LMU)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반기문의 가정은 1950년대 말까지 유복한 편이었으나, 부친의 창고업이 부도나면서 어려워졌다.

1971년 결혼한 배우자 유순택씨는 충주고와 충주여고 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났다. 슬하에 1남(반우현), 2녀(반선용, 반현희)를 두었다. 둘째 딸 반현희씨는 유엔 산하기구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 상훈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1년 3년 이상 주재 경력이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명예 대훈장을 받았다.

2002년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4년 9월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로부터 밴플린트 상을 받았다.

2006년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과 헝가리 자유의 영웅메달, 알제리 국가유공훈장을 받았다. 또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으로부터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과 한국언론인연합회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을 받았다.

2007년 3월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제9회 관악대상 영광부문을 받았다.

2008년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최고 훈장인 ‘시카투나 훈장’을 수여했다. 또 같은 해 국제 로터리 영예의 상을 받았다.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청조근정훈장도 받았다.

2012년 5월 탁월한 국제지도자상과 서울평화상심사위원회로부터 제11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또 올림픽훈장 금장을 수상했다.

2014년 1월 제2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과 201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로부터 올해의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

2015년 티퍼래리 국제평화상과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네덜란드 사자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 상훈

1975년 녹조근정훈장, 198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1년 3년 이상 주재 경력이 없었지만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명예 대훈장을 받았다.

2002년 한국과 브라질의 관계를 증진시킨 공로로 브라질 리오블랑코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2004년 9월 미국 코리아 소사이어티로부터 밴플린트 상을 받았다.

2006년 페루 태양 대십자훈장과 헝가리 자유의 영웅메달, 알제리 국가유공훈장을 받았다. 또 한국이미지커뮤니케이션연구원으로부터 한국 이미지 디딤돌상과 한국언론인연합회로부터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을 받았다.

2007년 3월 서울대 총동창회에서 수여하는 제9회 관악대상 영광부문을 받았다.

2008년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필리핀 최고 훈장인 ‘시카투나 훈장’을 수여했다. 또 같은 해 국제 로터리 영예의 상을 받았다.

200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청조근정훈장도 받았다.

2012년 5월 탁월한 국제지도자상과 서울평화상심사위원회로부터 제11회 서울평화상을 받았다. 또 올림픽훈장 금장을 수상했다.

2014년 1월 제23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과 2014년 미국 하버드대학교로부터 올해의 인도주의자 상을 받았다.

2015년 티퍼래리 국제평화상과 네덜란드 정부로부터 네덜란드 사자기사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어록


“오늘 시리아 항구 도시 자발레와 타르투스에서 민간인 수십 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 공격을 규탄한다.” (2016/05/24, 시리아에서 연쇄 폭탄 테러가 발생한 데 대해)

“우리는 역사적인 파리기후협정을 이뤄냈다. 이것을 살리는데 힘을 합쳐달라.” “기후변화 문제를 부인하는 정치인에게는 표를 주지도 말고, 재활용할 수 없는 물건을 사지도 말고, 전등도 좀 꺼달라.” (2016/05/19, 콜롬비아대학에서 법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한반도 평화증진을 위해 필요한 모든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한반도가 도전의 땅에서 진정한 기회의 땅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합니다.” (2012/10/30 대한민국 국회에서 열린 ‘유엔과 한국, 함께 이루는 인류의 꿈’ 연설에서)

“전체 유엔을 대신해 겸허한 마음으로 수락하고자 한다. 특히 한국인으로서 유엔사무총장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해에 수상하게 된 것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한다” (2012/06, 서울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우리는 통합과 상호 연결의 시대, 어떤 나라도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시대, 모든 나라가 해결책의 일부가 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 속에 살고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유엔의 역할은 선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여기서 무거운 책임감을 공유합니다. 그것이 바로 유엔이 과거 어느 때보다 다르고 심오한 방식으로 중요해진 이유입니다. 선도하기 위해 우리는 결과를 만들어내야 합니다.…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가 필요합니다.” (2011/06, 유엔 사무총장 두 번째 임기가 결정되고 선서를 하면서)

“사무총장으로 서 있는 저는 결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지금 이 자리에 참석하신 각국 사절단 여러분 모두의 아낌없는 지지와 협력과 신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저의 모든 진심과 능력을 아낌없이 발휘하여 여러분을 위해 충실히 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 [As your Secretary-General, I am far from being perfect,and I will need the unsparing support,cooperation and trust from all of the representatives present here. But I pledge to serve you well,with all of my heart and to the best of my abilities] (2006/12/15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에서)

“UN의 성공에 관한 진정한 평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이 약속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나 많이 일을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조직(UN)의 항구적 목적과 우리를 고취시키는 원칙들을 감안할 때 우리는 UN을 요란하게 칭송하거나 UN의 미덕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들을 하나하나 프로그램 별로 실천해 나가면 됩니다.” [The true measure of success for the UN is not how much we promise, but how much we deliver for those who need us most. Given the enduring purposes and inspiring principles of our Organization, we need not shout its praises or preach its virtues. We simply need to live them every day ; step by step, program by program, mandate by mandate.]
(2006/12/15 제8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선서에서)

"평화적 핵이용을 위해 핵폐기로 신뢰가 회복되면 (핵이용을) 북한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5/8/22 미국 CNN에 출연해 북핵 문제에 대해 답하면서)

“북한이 지금 현재 진행 중이거나 진행하려고 하는 모든 핵 관련 활동 이것은 6자 회담에서 합의가 이뤄진다면 당연히 중단되고 폐기돼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5/7/14 한 매체의 방송 프로그램에서 6자회담과 북핵 문제를 놓고)

“공직생활을 마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심하기도 했지만 묵묵히 일해 결국 새옹지마(塞翁之馬)가 됐다.”(2001년 차관직에서 물러나 유엔 총회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자)

“(장래희망은) 외교관입니다.” (1963년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비스타(VISTA) 프로그램 연수생인 고등학생 반기문에게 장래희망을 묻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대답을 듣고 빙그레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신웅진 저 '바보처럼 공부하고 천재처럼 꿈꿔라 : 세계의 대통령,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아름다운 꿈과 도전의 메시지'에서)

◆ 평가

한국인으로서 처음 유엔 사무총장이 됐다.

편안한 느낌을 주는 외모와 소탈한 성격을 지녀 대인관계가 원만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일처리에는 빈틈이 없다. 겸손하다고도 평가받는다.

사무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성실성을 가지고 원칙에 입각해서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 자기를 내세우기보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설득하는 리더십으로 인정받았다. 솔선수범해서 유엔이라는 조직을 이끌어왔다.

따뜻한 카리스마와 집요한 추진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그와 함께 일해 본 적이 있는 외교관들은 누구나 그가 상대에게 정상을 다해 신뢰감을 주면서도 동시에 엄청난 집요함으로 옮다고 생각하는 일을 추진해 결국 문제를 풀어내는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반기문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에서 대선에 패배한 측이 승복하지 않아 내전 상황으로 번졌을 때 문제에 개입해 승리한 측이 집권하도록 문제를 푸는 데 기여했다.

또 미얀마 군부를 끊임없이 압박해 올해 군부가 약속한 7단계의 민주화 과정 가운데 하나인 '국민총선'을 치르게 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그에 대해 “강하고 일관된 해법을 밀어붙이면서도 인간적으로 다가가서 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하는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라고 말했다.

자중자애를 인생의 살아온 방법으로 꼽는다. ‘머리는 항상 구름 위에 두지만 발은 땅을 딛고 있어야 한다. 발까지 떨어져 버리면 넘어진다’를 신념으로 간직해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인사제도 비서관으로 인사정책에 관여했던 최광웅 데이터정치연구소장이 참여정부의 인사 뒷얘기와 주요인물 20인에 대한 평가를 담은 저서 '노무현이 선택한 사람들'에서 반기문의 운명을 '운칠기삼(運七技三·운이 7할이고 기가 3할이라는 뜻)'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반기문의 이력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흥미롭게도 흘린 땀 못지 않게 고비마다 절묘하게 행운이 뒤따랐다고 평가했다.

2016년 방한하는 것을 두고 대권주자가 되기 위한 행보라는 시각이 있으나 반기문은 이에 대해서 부정했다. 그는 방문목적에 대해 “유엔의 목적에 의한 것으로 정치인을 만날 계획이 없으며 가족과 만나 조용히 있다가 올 것”이라고 밝혔다.

2016년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코노미스트는 "반 총장은 (유엔 내부의) 행정 능력이나 (유엔 밖의) 통치 능력 모두에서 실패한 총장으로 평가받고 있다"며 "코피아난 등 전 총장들에 비해 강대국들에 맞서는 것을 싫어했다"고 평가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말을 잘 못하고 절차에만 집착하고 현안에 대한 빠른 대처 능력이나 업무 깊이도 부족하다. 임기 9년이 지났는데도 '점령' 같은 논란이 되는 용어를 쓰는 실수도 했다" 며 "가장 활기 없는, 최악의 총장 중 한명"이라고 비판했다.

이는 그가 2016년 3월 북아프리카 순방 중 알제리 남서부 틴두프 지역의 스마라 난민촌을 방문한 자리에서 모로코가 서사하라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고 말한 것을 두고 비판한 것으로 모로코의 격노를 샀다.

이코노미스트는 또 "반 총장은 우수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 5개국이 특별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무난한 사람이었다"면서 그가 UN 수장으로 10년이나 임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미국과 러시아 등 UN 상임이사국이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무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도 반기문이 중요한 국제 현안에 대해 제때 필요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힘없는 관측자"라고 비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그가 국제문제에 있어 두드러지는 행보를 보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실질적인 힘이 없는 유엔 사무총장의 근본적인 한계를 간과한 채 그를 너무 비난하고 있다는 동정론도 나왔다.

◆ 기타

한때 `반주사' ‘반대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고위직이면서도 그 직급에 관계없이 자질구레한 일도 손수 챙겼다는 데서 붙여진 별명이다.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걸어온 사람들에게 반드시 회신을 해주며 수많은 연하장을 보낼 때도 이름은 직접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과거 자신이 모셨던 노신영 전 총리에게서 '사람관리'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일하는 것 자체가 체력관리"라고 생각해 별도의 운동을 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서 반기문의 강의 노트가 인기 있었다. 강의 노트가 꼼꼼하고 하나도 빠지지 않는 어떤 면에서 교과서보다 더 나았기 때문에 동기생들 사이에서 서로 보겠다고 경쟁이 치열할 정도였다고 한다.

2001년 차관에서 물러나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부임했을 때 반기문은 마지막 보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의 국제 경험과 인맥이 전화위복돼 유엔 사무총장 당선의 밑거름이 됐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