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희 기자 ssul20@businesspost.co.kr2016-03-30 10: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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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어록
생애
▲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서성환은 1924년 7월14일 황해도 평산군 적암면에서 아버지 서대근씨와 모친 윤독정씨의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 윤독정씨가 동백기름 등을 짜서 내다팔면서 시작한 화장품 가내 수공업을 가업으로 이어받아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으로 키웠다.
서성환은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9년부터 어머니의 가업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했다.
1945년 국내 첫 화장품 제조회사인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세워 화장품 사업을 키웠다.
차(茶)에 관심이 많아 제주도에서 차를 재배하며 차사업에도 공을 들였다.
태평양화학 회장과 태평양그룹 대표이사 회장을 맡았다.
화장품 계열사인 태평양은 차남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에게 물려주고 장남인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에게 금융, 건설, 금속 등의 계열사를 넘겨줬다.
2003년 1월9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라”라는 경영철학을 견지했다. 국내 화장품업계가 지금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김신권 한독화장품 회장은 2014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서성환에 대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회장실 집기 비품을 25년간 사용할 정도로 근검절약하는 오너로 잘 알려져 있다.
생전에 회사에서는 직원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별일이 없는 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이었던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과 대만에 직원을 파견해 일찌감치 중국 진출을 준비하는 글로벌 감각을 갖췄다.
중국과의 수교가 이뤄져도 화장품은 다른 품목보다 규제와 관세장벽이 높아 사업진출이 쉽지 않아 현지생산이 불가피했다. 당시 대부분의 글로벌 화장품 회사들이 대도시인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공장을 짓는 것과 달리 서성환은 선양에 공장을 지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글로벌 경쟁사들이 이미 진출해 경쟁이 치열하지만 중국 동북 3성의 중심이 되는 선양은 상대적으로 경쟁사들의 관심 밖에 있기 때문에 안정적 시장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선양에서의 사업이 안정화되자 태평양은 거점을 하나둘씩 확대해 1995년에는 다롄에, 1996년에는 창춘과 하얼빈에 진출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45년 9월 한국 최초의 화장품 회사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세웠다.
1954년 국내 화장품 업계 최초로 연구실을 만들었고1957년에는 연구원을 독일로 유학 보내 유럽의 생산시설과 원료에 관한 정보 및 화장품의 시장동향을 꾸준히 수집하는 한편 유럽의 최신 설비들을 수입했다.
1958년에는 국내 최초 사외보이자 여성 교양지인 ‘화장계’를 발간했다.
1959년 프랑스 화장품 대기업 코티사와 기술 제휴를 맺었다.
1964년 3월 태평양은 일본화장품 시세이도와 기술제휴를 한 뒤 방문판매 전용 제품의 브랜드명을 공모했다. 100여 편의 응모작 가운데 '아모레’를 새로운 브랜드로 정하고 방문판매 시스템을 도입해 소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화장품업계 선두주자 자리를 확고하게 다졌다.
1964년 ‘오스카’라는 브랜드 화장품을 에디오피아에 수출하며 국내 화장품 최초로 수출을 이뤄냈다. 1966년에는 세계 최초의 한방 화장품인 'ABC인삼크림'을 출시했다.
1972년을 기점으로 사업다각화에 나서 1972년 화장품 판매를 전담하는 태평양상사를 설립하고 1974년 장원산업을 설립해 부동산 임대업에도 진출했다.
1978년 태평양화학 회장을 맡았으며 그해 태평양기술연구소를 설립했다.
1979년부터 사라져버린 차(茶) 문화를 되살리자는 생각으로 제주도에서 차 재배를 시작했다. 그해 국내 최초의 화장품박물관인 태평양박물관(디아모레뮤지움)을 지었고 2001년 제주도에 오설록티뮤지엄을 개관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동방증권을 인수해 증권업에도 발을 들였으며 전자와 자동차부품 사업도 시작했다.
1993년 ‘쓰던 화장품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꿔준다’는 무한 책임주의를 선언해 업계에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978년 새마을훈장 노력장, 1984년 한국경영자상, 체육훈장 맹호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199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사후인 2004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 상훈
1971년 철탑산업훈장, 1974년 은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8년 새마을훈장 노력장, 1984년 한국경영자상, 체육훈장 맹호장,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1990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사후인 2004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어록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자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화장품 외길이야말로 나의 꿈이고 삶 자체이며, 화장품 없는 내 인생은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차는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은 아니다. 이것은 문화사업이다. 계속 적자가 나겠지만 이 사업이 성공하면 태평양은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를 얻을 것이다” (1979년 녹차밭 개간사업을 시작했을 때)
“판매보다 기술 개발에 더 힘을 쏟아 소비자가 제품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돈이란 노력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벌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것 같아요. 덕 있는 사람으로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한다면 성공 안할 수가 있겠어요?” (1973/04/15, 선데이서울과 인터뷰에서 '30년 가까이 80% 가까운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며 화장품 최대 메이커로 군림해온 비결’을 묻자)
◆ 평가
“소비자를 속이지 말고 소비자에게 더 큰 이익을 주라”라는 경영철학을 견지했다. 국내 화장품업계가 지금처럼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 받는다.
김신권 한독화장품 회장은 2014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서성환에 대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회장실 집기 비품을 25년간 사용할 정도로 근검절약하는 오너로 잘 알려져 있다.
생전에 회사에서는 직원들과 같은 유니폼을 입고 별일이 없는 한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이었던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과 대만에 직원을 파견해 일찌감치 중국 진출을 준비하는 글로벌 감각을 갖췄다.
중국과의 수교가 이뤄져도 화장품은 다른 품목보다 규제와 관세장벽이 높아 사업진출이 쉽지 않아 현지생산이 불가피했다. 당시 대부분의 글로벌 화장품 회사들이 대도시인 베이징, 상하이 등지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공장을 짓는 것과 달리 서성환은 선양에 공장을 지었다.
베이징과 상하이는 글로벌 경쟁사들이 이미 진출해 경쟁이 치열하지만 중국 동북 3성의 중심이 되는 선양은 상대적으로 경쟁사들의 관심 밖에 있기 때문에 안정적 시장진입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전략은 적중했다. 선양에서의 사업이 안정화되자 태평양은 거점을 하나둘씩 확대해 1995년에는 다롄에, 1996년에는 창춘과 하얼빈에 진출했다.
◆ 기타
서성환은 생전에 “우리 회사의 모태는 나의 어머니다. 우리 회사는 여성이 키운 기업이다”고 자주 말했다.
서성환이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어머니 윤독정씨는 1939년 개성에서 창성상점 간판을 내걸고 창성당제품을 판매한 여성 사업가였다. 서성환은 어머니를 통해 깐깐한 개성상인의 정신을 배울 수 있었다.
또 어머니의 권유로 개성 최초의 백화점인 김재현백화점에서 창성당제품을 판매하면서 유통과 판매 업무를 배우고 선진적인 일본화장품을 접했다.
그러던 중 1945년 1월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전쟁터로 끌려갔다가 광복을 맞아 9월5일 중국 베이징에서 제대했다. 훗날 이 날짜를 아모레퍼시픽의 창립 기념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