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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개봉된 영화 '돈의 맛'은 압도적인 비밀금고 장면으로 시작된다. 영화는 돈의 맛에 중독된 대한민국 재벌의 이면을 보여준다. |
비밀번호를 누르자 묵직한 철문이 열린다. 문 뒤편에 위치한 3평(9m
2) 남짓한 그 방은 다름 아닌 거대한 금고였다. 거기에는 5만원권과 100달러권 뭉치가 성인 남자 키보다 높이 쌓여있다.
영화 ‘돈의 맛’의 첫 장면이다. 회장님의 ‘비밀금고방’은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횡령 등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있는 이재현 CJ그룹 회장 공판에서 비밀금고방 돈의 성격과 사용처를 놓고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7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4부(재판장 김용관) 심리로 진행된 이 회장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그룹의 전 재무2팀장 서모씨는 "금고에는 회삿돈과 이 회장의 돈이 분리되어 보관되었으며, 이 사용처도 회삿돈은 공적 용도로 이 회장의 돈은 개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진술했다. 이에 앞서 연말에 열린 공판에서는 서씨의 후임 팀장인 이씨가 나와 "임원 상여금을 돌려받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해 이 회장의 주택수리, 의복구입 등 개인적으로 사용했으며, 술집 영수증 등을 모아 회계처리를 했다"고 폭로했다.
이 회장 재판 과정에서 본사 14층 이 회장 방과 신동기 CJ글로벌홀딩스 부사장 사무실 사이에 위치한 비밀금고방의 실체가 생생하게 드러났다.
◆ 본사 14층 ‘비밀금고방’, 만원짜리 지폐로만 채워져
비밀금고방은 작은 금고방의 가벽 뒤에 숨어있다. 비밀금고방에는 사무실이 딸려 있었고 거기에 책상 2개와 현금계수기가 놓여있다. 사무실에서부터 열쇠, 리모컨, 다시 열쇠로 철제 방화문을 차례로 열고 들어가면 마침내 비밀금고방의 마지막 관문인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다.
콘크리트 벽과 바닥으로 된 3평(9m
2)짜리 비밀금고방에는 만원짜리 뭉치를 1억 단위로 차곡차곡 쌓아놨었다고 한다. 빳빳한 만원짜리 신권 100장의 높이는 1cm, 1억원이면 1m다. 이 비밀금고방을 만원짜리 지폐로 가득 채운면 그 금액은 900억원에 달한다.
비밀금고방과 재무 2팀 사무실을 연결하는 비밀계단도 있었다. 제일제당에서 1만원권 현금을 100장씩 묶어 쇼핑백에 담아 가져오면 재무2팀 측은 이를 비밀금고방에 저장한 뒤 필요할 때 꺼내 회장실에 전달했다고 한다
회장님의 비밀금고가 얼굴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회장님들은 왜 비밀금고방을 좋아하는 것일까? 회삿돈을 쌈짓돈처럼 쓸 수 있는 '돈의 맛' 때문이다.
2008년 삼성그룹 법무팀장 출신의 김용철 변호사는 "본관 27층 재무팀 관재파트 담당임원 사무실 내부에 벽으로 위장된 비밀금고가 있으며 이곳에 현금, 상품권, 순금 등 비자금과 로비 대상자 명단까지 은닉돼 있다”고 폭로했다. 이에 삼성 비자금 의혹을 수사 중이던 특검팀은 삼성 본관에 자리한 삼성 전략기획실 사무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 사무실 등에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특검팀은 금고 확인을 위해 수색 당시 공구통을 사전 준비해 벽면을 뜯어내면서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비밀금고는 없었다.
◆ 드러난 회장님들의 비밀금고 살펴보니... 역시 철두철미 ‘삼성’!?
이후 본관 27층이 아니라 삼성화재 건물 22층에 비밀금고가 존재한다는 전직 삼성 금융계열사 직원 김모씨의 제보를 받은 특검팀은 사실 확인을 위해 또 다시 압수수색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비밀금고는 찾을 수 없었고 급히 벽을 막은 흔적만 발견되면서 압수수색은 종료됐다. 삼성은 CJ와 달리 비밀금고 속 내용물뿐만 아니라 비밀금고 그 자체를 증발시키는 철두철미함을 보여줬다.
2006년 이주은 전 글로비스 사장의 비밀금고가 발각됐다. 사전 제보를 받은 검찰의 압수수색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수사관들은 글로비스 본사 내 재무팀 벽에 세워져 있던 책꽂이 중 하나를 주저 없이 젖혔다. 책꽂이 뒤에는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을 열자 비밀 금고의 모습이 드러났다. 비밀금고 속에는 수십억원어치의 현금, 양도성예금증서, 달러가 들어있었다. 글로비스의 비자금이 확인되자 검찰은 현대차의 정•관•금융계 로비에 초점을 맞춰 수사를 진행해나갈 수 있었다.
2003년에는 현직 대통령 정치자금을 뒤지는 희대의 사건으로 비화된 비밀금고 사건이 터졌다. 금고의 주인은 최태원 SK 회장이었다. SK 분식회계에 대한 내사를 벌이던 서울지검 형사9부 수사관들이 작심한 듯 SK 본사에 들이닥쳤다. 수사관들은 곧장 최 회장 집무실로 직행해 금고를 열었는데 거기서 SK 분식회계를 뒷받침하는 각종 대외비 서류와 함께 ‘정치자금 리스트’가 발견 된 것이 화근이었다.
1999년 국세청 조사요원들과 (주)부광 사무실 직원들이 금고 하나를 두고 꼬박 이틀을 대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금고는 열렸고 금고 안에서 탈세를 뒷받침하는 1,071개의 은행통장과 수백개의 목도장이 쏟아졌다. 조사결과 보광과 특수관계인의 탈세금액만 9백50억원을 웃돌았다. 당시 부광의 대주주였던 홍석현 현 중앙일보 회장은 조세포탈 혐의 등으로 구속되는 곤욕을 치뤘다.
금고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금고지기’가 있었다. 이번 이재현 CJ회장 비밀금고방의 실체도 전직 재무2팀장의 진술이 결정적으로 작용해 드러났다. 비밀금고는 누군가에 의해 한번 열리면 파장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치명적이다. 이번에 열린 이 회장의 비밀금고방도 마찬가지 결과를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