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Who] '그날,바다'  배급한 엣나인필름 정상진, 영화의 힘 믿는다

▲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이사.

“세상은 한 명의 아이조차 구할 수 없는 건가요?”

영화 ‘어둠의 아이들’에서 사회복지활동가 케이코는 절망에 빠져 묻는다. 이야기는 어린 소년 소녀들이 성 착취와 장기 밀매를 위해 사고 팔리는 태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정상진 엣나인필름 대표이사는 이 영화를 보고 악몽에 시달리다 배급사업을 시작했다. 그가 수입해 극장에 건 첫 영화다.

19일 기준으로 엣나인필름이 배급한 영화 ‘그날, 바다’는 누적 관객 수 27만6474명을 보였다.

'그날, 바다'는 세월호가 왜 가라앉았는지에 온전히 주목한다. ‘공범자들’의 최종 관객 수인 26만512명을 뛰어넘으면서 역대 정치시사 다큐멘터리 영화 가운데 흥행 1위에 올라섰다.

이제 2위로 물러나게 된 공범자들의 배급사 역시 엣나인필름이다. '공범자들'은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언론인 해직사태를 다뤘는데 지난해 국제 엠네스티에서 언론상 수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정 대표는 사회적 메시지가 강한 영화들의 배급과 제작에 유독 많이 참여해왔다.

‘김근태 고문사건’을 다룬 ‘남영동1985’. 세월호 참사 당시 구조과정의 문제점을 고발한 ‘다이빙벨’, 국정원 간첩 조작 의혹 사건에 관한 ‘자백’, 일제강점기 종군위안부의 비극을 그린 ‘눈길’ 등이 대표적이다. 

'눈길'은 관객이 영화에 직접 투자하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개봉했다.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해 원래는 투자자들이 손실을 봐야 했지만 엣나인필름은 투자금을 모두 돌려줬다. 

'남영동1985' 때문에 2012년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회사이름이 올랐다. 이 블랙리스트를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있는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정 대표가 한 모임에서 만난 일도 있다. 

당시 조 전 장관은 그가 '남영동1985'를 배급한 회사 대표라는 것을 알자 “왜 다른 편이 여기 와서 이래요”라며 악수하던 손을 뿌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정 대표는 스스로 영화를 고르는 기준에 ‘편 가르기’는 없다는 지론을 품고 있다. 

그는 블랙리스트 소식을 전해 받은 뒤 SNS에 “성숙한 사회는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고 그 소리를 인정하는 사회”라며 “한 번도 우리영화가 편향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영화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매체다”고 적기도 했다. 

실제로 정 대표는 개성이 다양한 독립예술영화들을 수입해 배급하고 있다.

선정성 논란이 크게 일었던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 볼륨1·2’, 신과 종교를 풍자한 코미디인 자코 반 도마엘 감독의 ‘이웃집에 신이 산다’ 등을 국내에 들여왔다. 

프랑스 자비에 돌란 감독의 신인 시절 초기작 ‘하트비트’를 국내에 처음 알리기도 했다. 돌란 감독은 1989년생 천재 연출가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개봉한 돌란 감독의 영화만 따지면 엣나인필름이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판권을 모두 들고 있다.

올해 3월에는 에이즈 환자의 인권 운동단체 ‘액트 업’의 이야기 '120BPM'을 수입했다. 지난해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수작이지만 민감한 주제이다 보니 네이버 평점은 10점 만점에서 2.65에 그쳤다. 

정 대표는 예술영화전용관인 ‘아트나인’도 2013년부터 서울 사당동에서 운영하고 있다. 매년 5억 원가량의 적자를 감수하고 있다고 한다. 엣나인필름은 2016년 기준 매출 52억 원, 영업이익 1억 원가량 적자를 봤다.

이쯤 되면 그를 ‘영화인’이 아니라 말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극장주나 수입업자들은 대개 영화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정 대표는 영화를 자본없이 존재하지 못하는 총체적 예술이라고 여긴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남산에 있는 영화촬영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의 버스에 끼어들어 촬영 현장을 기웃거렸다. 

대학도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갔다. 연출가가 되고 싶은 나머지 할리우드에서 제작을 하던 선배에게 일면식도 없이 매일 전화를 했다. 덕분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만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로는 생활이 힘들 것 같았던 데다 시나리오를 쓸 자신이 없어 광고 일을 시작했다. 

‘외도’는 오래가지 않았다. 왜 영화를 배우고 영화를 안 하고 있나 하는 고민에 시달리다 1998년 남산에 자동차극장을 열면서 영화계에 돌아왔다. 

엣나인필름은 2007년 세웠다. 원래 극장 운영만 하다 2010년 처음으로 배급한 영화가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어둠의 아이들’이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사회 문제에 관심없이 살았는데 어둠의 아이들을 보고 ‘영화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감동을 받았다”며 “아무도 그 영화를 수입하려 하지 않아 1년 동안 가위에 눌리다가 결국 일본에서 영화를 사왔다”고 말했다. 

'어둠의 아이들'은 일본 신문기자 난부의 자살로 끝이 난다. 난부는 태국 아동들의 장기밀매 현장을 포착하기 위해 생명을 건 취재를 한다. 마침내 수술실에 들어가는 아이 ‘센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면서 취재는 성공적으로 마치지만 센라를 산 채로 심장이 적출될 운명으로부터 구해내지 못한다. 

영화 밖 현실도 비극적인데 태국에서는 여전히 아동 인신매매가 일어나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이 영화가 개봉한 뒤 관련 NGO(비정부기구) 회원 가입과 후원금이 늘었다고 한다. 

“영화처럼 많은 사람에게 닿을 수 있는 예술은 없다.”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늘 하는 말이다. 정 대표도 영화의 영향력을 믿는 '영화인' 의 한사람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고진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