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신한금융의 상생 노력에 관한 기사를 내보낸 다음날인가, 기사를 쓴 후배 기자와 저녁을 먹다가 재미난 얘기를 들었다. 진옥동 회장에 관한 사연이다.
“진 회장이 포럼 같은 데서 인사말이나 메시지를 전할 때, 어떤 말이 나올지 직원들도 행사 전엔 모른대요.”
“정말? 홍보실에서 대개 써주는 거 아닌가. 예년 것들 참고해서 쓰고, 경영자들이 거기에 보탤 것 보태고.”
“진 회장은 원고를 직접 쓴대요. 홍보실도 행사가 다 끝나고 그걸 정리해 언론에 내보낸다 하더라고요.”
기업들은 행사 전, 청중들에게 전해야 할 텍스트들을 식순에 따라 미리 정리한다. 그렇게 스크립트를 준비한다. 스크립트에서 진 회장의 코멘트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는 얘기다.
큰 조직 어디서나 그렇지만 ‘대필’은 관행이다.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건 전략이지 레토릭이 아니기도 하다.
이른바 ‘씨레벨(C-level)’의 최고경영자, 임원들이 직원 또는 대중에게 알려야 할 메시지를 자기 언어로 직접 적어야 할 필요는 많지 않다.
하지만 전략의 급진적 변화를 알려야 할 때, 조직문화의 혁신이 필요할 때는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다루는 부서에, 십 여 년에 걸쳐 파일의 형식으로 전해져 온 텍스트로 변화와 혁신의 취지를 강렬하게 전파하기는 쉽지 않다.
‘내부통제’를 업(業)의 한 축으로 삼는 금융권에서도 그런 일이 생긴다. 충격적이거나 매혹적인 ‘말’로 조직을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편법의 관행을 깨기 어려운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진옥동 회장의 메시지 그리고 메시지 전달 방식은 금융권 씨이오 중에 유별난 데가 있다.
신한금융의 올해 경영 슬로건이 ‘후마니타스’와 ‘코무니타스’인데, 원전이 고대 로마의 책 ‘의무론’이다.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도를 높여(후마니타스), 공동체의 선을 이뤄내자는(코무니타스) 취지다.
한두 개의 인상적인 단어로 슬로건을 뽑아내는 건 별일 아니다.
그런데 진 회장의 메시지에선 그냥 광고 카피 정도와는 다른 무언가가 읽힌다.
연초 신한금융포럼이 열렸다. 진 회장은 임원들에게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에 관한 토론을 청했다. 기원 직전, 로마가 황제정으로 이행하기 전에 키케로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 그의 저작 중 하나가 ‘의무론’인데, 토론자들은 2000년 전의 고전을 읽고 포럼에 참석했다.
이 자리엔 ‘의무론’을 우리말로 번역한 김진식 박사도 참석했다. 진 회장의 키케로 천착은 ‘카피 뽑는’ 수준의 허울이 아닌 셈이다.
내친 김에 비즈니스포스트의 CEO 데이터베이스 ‘후이즈(Who Is?)’의 ‘진옥동’ 항목에 들어갔다. 어록을 살폈다. 작년 1월 초 진 회장의 신년사에 낯선 어휘가 하나 등장한다.
“이택상주(麗澤相注)의 마음가짐으로 각오를 다지자.”
주역 64괘를 인수분해하면 여덟 개의 자연 요소가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연못(택, 澤)이다. 64괘 중엔 위로 연못, 아래로 연못을 겹쳐 놓은 괘가 등장하고(중택태), 겹친 연못의 이미지를 말로 풀면 ‘이택’이다. 붙어 있는(이) 연못(택)이다.
사이좋게 나란한 연못이 서로에게(상) 물을 대주고(주) 있는 모습이 ‘이택상주’다. 말하자면, 동양 고전인 주역 버전의 상생 얘기다.
진 회장은 ‘상생’을 얘기하기 위해 때론 고대 로마를 뒤지고(코무니타스), 때론 동양의 고전을 파헤치기도 하는 셈이다(이택상주). 진 회장이 올해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상생의 원칙은 그러니까, 2000~3000년 전 동서양을 횡단하며 얻어낸 철학적 가치다.
비즈니스는 결국 개념 싸움이다. 수십 또는 수백 개의 개념을 가상의 시장 위에 종횡으로 엮어가며 전략을 만들고, 그 전략을 고객의 마음에 투영해 마케팅 계획을 짠다.
그때 쓰이는 개념들은 주로 선배 경영인과 경영 그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가끔 파격적인 경영자들이 나타나 경계를 흐린다. 경영과 경제의 테두리 밖에 산재한 인문학적 개념들을 끌어다 ‘개념의 싸움판’을 새롭게 짠다.
그렇게 경계를 허물어 개념을 혼용시키는 이들을 두고 ‘자기 언어’를 가졌다고 한다. 진 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금융업계에서 독특하게 자기 언어를 가진 축에 낀다.
진 회장이 ‘상생’을 앞세워 일으키고 있는 사회적 반향이 어쩌면 특유의 자기 언어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후배와의 저녁 자리에서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채워지는 스크립트의 공란이 신한금융식 상생의 진짜 원천일 수도 있겠다. 이지형 금융증권부장/부국장
“진 회장이 포럼 같은 데서 인사말이나 메시지를 전할 때, 어떤 말이 나올지 직원들도 행사 전엔 모른대요.”
![[데스크리포트 7월] 신한금융지주 회장 진옥동의 비워진 원고](https://www.businesspost.co.kr/news/photo/202507/20250708145114_57125.jpg)
▲ 신한금융 진옥동 회장은 대내외 메시지를 직접 작성한다. 메시지의 원전은 동서양을 넘나든다.
“정말? 홍보실에서 대개 써주는 거 아닌가. 예년 것들 참고해서 쓰고, 경영자들이 거기에 보탤 것 보태고.”
“진 회장은 원고를 직접 쓴대요. 홍보실도 행사가 다 끝나고 그걸 정리해 언론에 내보낸다 하더라고요.”
기업들은 행사 전, 청중들에게 전해야 할 텍스트들을 식순에 따라 미리 정리한다. 그렇게 스크립트를 준비한다. 스크립트에서 진 회장의 코멘트는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는 얘기다.
큰 조직 어디서나 그렇지만 ‘대필’은 관행이다. 비즈니스에서 중요한 건 전략이지 레토릭이 아니기도 하다.
이른바 ‘씨레벨(C-level)’의 최고경영자, 임원들이 직원 또는 대중에게 알려야 할 메시지를 자기 언어로 직접 적어야 할 필요는 많지 않다.
하지만 전략의 급진적 변화를 알려야 할 때, 조직문화의 혁신이 필요할 때는 얘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다루는 부서에, 십 여 년에 걸쳐 파일의 형식으로 전해져 온 텍스트로 변화와 혁신의 취지를 강렬하게 전파하기는 쉽지 않다.
‘내부통제’를 업(業)의 한 축으로 삼는 금융권에서도 그런 일이 생긴다. 충격적이거나 매혹적인 ‘말’로 조직을 흔들어 깨우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편법의 관행을 깨기 어려운 상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진옥동 회장의 메시지 그리고 메시지 전달 방식은 금융권 씨이오 중에 유별난 데가 있다.
신한금융의 올해 경영 슬로건이 ‘후마니타스’와 ‘코무니타스’인데, 원전이 고대 로마의 책 ‘의무론’이다. 개개인의 인격적 완성도를 높여(후마니타스), 공동체의 선을 이뤄내자는(코무니타스) 취지다.
한두 개의 인상적인 단어로 슬로건을 뽑아내는 건 별일 아니다.
그런데 진 회장의 메시지에선 그냥 광고 카피 정도와는 다른 무언가가 읽힌다.
연초 신한금융포럼이 열렸다. 진 회장은 임원들에게 고대 로마 철학자 키케로에 관한 토론을 청했다. 기원 직전, 로마가 황제정으로 이행하기 전에 키케로는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 그의 저작 중 하나가 ‘의무론’인데, 토론자들은 2000년 전의 고전을 읽고 포럼에 참석했다.
이 자리엔 ‘의무론’을 우리말로 번역한 김진식 박사도 참석했다. 진 회장의 키케로 천착은 ‘카피 뽑는’ 수준의 허울이 아닌 셈이다.
내친 김에 비즈니스포스트의 CEO 데이터베이스 ‘후이즈(Who Is?)’의 ‘진옥동’ 항목에 들어갔다. 어록을 살폈다. 작년 1월 초 진 회장의 신년사에 낯선 어휘가 하나 등장한다.
“이택상주(麗澤相注)의 마음가짐으로 각오를 다지자.”
주역 64괘를 인수분해하면 여덟 개의 자연 요소가 등장하는데 그중 하나가 연못(택, 澤)이다. 64괘 중엔 위로 연못, 아래로 연못을 겹쳐 놓은 괘가 등장하고(중택태), 겹친 연못의 이미지를 말로 풀면 ‘이택’이다. 붙어 있는(이) 연못(택)이다.
사이좋게 나란한 연못이 서로에게(상) 물을 대주고(주) 있는 모습이 ‘이택상주’다. 말하자면, 동양 고전인 주역 버전의 상생 얘기다.
진 회장은 ‘상생’을 얘기하기 위해 때론 고대 로마를 뒤지고(코무니타스), 때론 동양의 고전을 파헤치기도 하는 셈이다(이택상주). 진 회장이 올해 유난히 강조하고 있는 상생의 원칙은 그러니까, 2000~3000년 전 동서양을 횡단하며 얻어낸 철학적 가치다.
비즈니스는 결국 개념 싸움이다. 수십 또는 수백 개의 개념을 가상의 시장 위에 종횡으로 엮어가며 전략을 만들고, 그 전략을 고객의 마음에 투영해 마케팅 계획을 짠다.
그때 쓰이는 개념들은 주로 선배 경영인과 경영 그루들이 만들어 놓은 것이지만, 가끔 파격적인 경영자들이 나타나 경계를 흐린다. 경영과 경제의 테두리 밖에 산재한 인문학적 개념들을 끌어다 ‘개념의 싸움판’을 새롭게 짠다.
그렇게 경계를 허물어 개념을 혼용시키는 이들을 두고 ‘자기 언어’를 가졌다고 한다. 진 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금융업계에서 독특하게 자기 언어를 가진 축에 낀다.
진 회장이 ‘상생’을 앞세워 일으키고 있는 사회적 반향이 어쩌면 특유의 자기 언어에서 기인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후배와의 저녁 자리에서 했다. 행사가 시작되고 나서야 채워지는 스크립트의 공란이 신한금융식 상생의 진짜 원천일 수도 있겠다. 이지형 금융증권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