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눈] SPC 허영인 '사과의 정석' 배워야, 뒷북 반복되면 모든 게 허사다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 2022년 10월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양재동 SPC 본사에서 평택 SPC 계열사 SPL의 제빵공장 사망 사고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망 사고가 발생한 지 6일 만이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 고심을 거듭해봐야 때를 놓치면 진정성을 담았다고 한들 그 어떤 사과도 소용이 없다.

‘사과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 있다. 바로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다.

2022년 9월26일 오전 7시45분경.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에서 화재가 났다. 이 사고로 7명이 사망하고 1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정지선 회장은 회사에 출근한 뒤 이 소식을 접했다. 본사 직원들이 어떻게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기도 전에 정 회장은 대전으로 향했다. 직접 현장을 찾은 그는 오후 4시 사고현장 앞에 서서 사과문을 읽었다.

“현대백화점은 이번 사고에 무거운 책임감을 통감하며 사고의 수습과 정확한 원인 규명을 위해 관계 당국에 최대한 협조할 것입니다. 향후 경찰서, 소방서 등 관계 당국의 조사에 성실히 임할 것이며 어떠한 책임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무척 빠른 속도였다. 사고가 발생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오너경영인이 직접 대중 앞에 허리를 깊이 숙이고 사과하는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정 회장은 이후 대전 시내 병원 5~6곳으로 흩어진 유가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사과의 고개를 정중히 숙였다.

현대백화점그룹이 당시 사고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지 않고 원만하게 사고를 수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 회장의 빠르고 정확한 사과가 있었기 때문임을 부인하기 힘들다.

정 회장이 보여준 ‘사과의 정석’과 대비되는 인물도 있다. 바로 허영인 SPC그룹 회장이다.

지난 19일 새벽 3시, 경기 시흥에 있는 SPC삼립 시화공장에서 50대 노동자가 사망했다.

SPC그룹 계열 공장에서 난 사망사고만 3년 사이 세 번째다.

그동안 반복된 안전사고로 질타를 받았던 것을 의식해서인지 초창기 대응은 빨랐다. 

김범수 SPC삼립 대표이사는 사고가 난 지 1시간 만에 입장문을 내고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위로와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론은 갈수록 들끓고 있다. 

수 년 전 인터넷에 떠돌던 SPC그룹 계열 브랜드 불매운동이 다시 확산하더니 최근에는 급기야 SPC삼립이 지난 3월 내놓아 ‘히트를 친’ 크보빵을 불매하겠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월급쟁이 대표가 아닌 회사의 진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허영인 회장의 사과가 없다는 점을 문제라고 보는 시선이 상당하다.

이럴 때만 나서는 정치권, 회사와 각을 세워 왔던 노동계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 사이에서도 부정적인 반응이 터져 나온다.

그러나 사고 이후 8일이 흘렀지만 허 회장은 여전히 사과하지 않고 있다.

사과를 미룰수록 SPC그룹이 받게 될 타격이 커진다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가능성을 이유로 눈치만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사과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기자의눈] SPC 허영인 '사과의 정석' 배워야, 뒷북 반복되면 모든 게 허사다

▲  2022년 9월26일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 앞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데 대해 사과의 뜻을 전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달랐던 이유는 바로 여기 있다.

정 회장 역시 현대프리미엄아울렛 대전점의 화재 사고와 관련해 중대재해처벌법의 적용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민주노총은 정 회장을 중대재해처벌법으로 입건하라는 기자회견을 고용노동청 앞에서 열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어떠한 책임도 회피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만으로 정 회장과 현대백화점그룹이 얻은 것은 결코 적지 않다.

허영인 회장이 언제 대중 앞에 모습을 보일지는 알 수 없다. 전문경영인이 사과했으니 그만이라는 태도로 계속 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보인다.

허 회장은 2023년 12월 국회에서 열린 ‘산업재해 관련 청문회’에 출석해 “회사를 퇴직한지 5년 됐고 그 이후에는 대표이사에게 완전히 위임을 해 책임경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며 “퇴직 이후 5년 동안 한 번도 (공장을) 가본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이제와 사과하더라도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는 2022년 10월21일 대국민 기자회견을 열고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 여러분의 엄중한 질책과 지적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했는데 이는 SPL 제빵공장에서 20대 노동자가 사망한 지 엿새 만이었다. 당시에도 시간을 질질 끌다가 여론의 성화에 못 이겨 뒤늦게 사과했다는 점을 두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허 회장이 사과한다면 온라인에서 ‘올바른 사과문을 작성하는 법’이라는 글을 한 번 볼 것을 추천한다.

‘나는 누구인가’, ‘본인이 언제 어디서 무슨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가’, ‘그래서 누구에게 피해를 끼쳤는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가’, ‘앞으로 어떻게 이 일을 책임질 것인가’는 꼭 들어가야 할 요소다.

반면 ‘본의 아니게’, ‘오해’, ‘앞으로는 신중하게’,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저만 잘못한 것은 아니다’ 등의 말은 해서는 안 된다. 남희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