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정치는 말(言)로, 경제는 수(數)로 굴러간다. 이상적인 구분일 뿐일까. 이백 년 넘게 이어진 역사를 통해 경제학은 그 이상을 집요하게 좇았다. 경제학사(史)는 경제로부터 정치를 떼어내려던 불굴의 시도다. 

경제학 교과서에 빽빽한 미적분과 행렬과 통계의 도식에는 ‘정치로부터의 독립’을 꿈꾼 시대적 천재들의 고민과 열정이 배어 있다. 
 
[데스크리포트 2월] '정치 불확실성 지수' 살펴보다 확인한 두 가지

▲ 경찰들이 2024년 12월4일 국회 정문 앞에서 탄핵을 외치는 시민들을 통제하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그러면 뭐하나. 

시대의 이단아들이 갑자기 나타나 애써 세우고 매만진 정치와 경제의 경계를 부순다. 예컨대 트럼프는 마약 유통을 막겠다는 허언(말)으로 주변국에 관세(수)를 때린다. 이재명의 기본소득은 거시·미시 어느 쪽의 경제학(수)도 들출 생각이 없는 정치적 수사(말)다. 

트럼프의 관세도, 이재명의 기본소득도 본질은 ‘정치의 경제 침해’다. ‘말’로 ‘수의 세계’를 파고들어 뒤엎으려는 불온한 시도다. 말로 수를 지배하려는 이들이 있다. 

말이 수를 지배한 드라마틱하면서도 극단적인 사례가 지난 세기 소비에트 연방의 건설과 운영이다. 그들은 말(계획)로 수(경제)를 구획하고 재배치했다. 이제 지난 시대의 유령으로 유라시아의 변방을 떠돌 뿐인 공산주의는 ‘말의 제국주의’를 꿈꾸던 시절의 거대 기획이다. 동기의 순수·불순을 따져 무엇 하겠나. 실패한 기획이다. 

말에 대한 수의 우위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오염된 말이 정갈한 수의 세계를 망가뜨린다고 말할 생각도 없다. 말과 수엔 저마다의 영역이 있고, 그 경계를 가급적 무너뜨리지 않는 편이 세상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에 도움이 될 거란 생각만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소소한 행복 빼고 중요한 게 또 뭐 있겠나. 그래서 누구도 대놓고 깨뜨리기를 삼가는 말과 수의 경계가, 두 달 전에 심각하게 무너졌다. 폭설로 내린 첫눈에 놀란 가슴을 다독이던 초겨울의 어느 멀쩡한 밤, 대통령이 군대를 동원해 국회 의사당의 창을 깼다. 

그날 무너진 건 무(武)와 문(文)의 경계뿐은 아니다. 말과 수의 경계도 함께 무너졌다. ‘계엄’이란 이름의 착란적 정치(말)가 경제(수)를 들쑤셨다.
 
[데스크리포트 2월] '정치 불확실성 지수' 살펴보다 확인한 두 가지

▲ 한국은행 본관 전경. <한국은행>


한국은행은 봄·여름·가을·겨울, 일 년에 네 차례 경제 성장률을 전망한다. 통상 2월, 5월, 8월, 11월에 숫자를 공개한다. 올해는 1월 하순에 ‘뒤늦게’ 한 번 더 내놨다. 연초인데 ‘서둘러’라 말하지 않고 ‘뒤늦게’라 한 건 지난해 11월 숫자의 수정본이기 때문이다. 

11월 한국은행이 내놓은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1.9%다. 경제를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탄식했다. 1월 하순에 한국은행은 그 숫자를 더 끌어내려야 했다. 1.6~1.7%의 전망치를 내놨다. 두 달 만에 0.2~0.3%포인트의 성장률이 허공으로 사라지자 사람들은 한탄했다. 11월의 탄식과 1월의 한탄 사이에 ‘정치 불확실성 지수’가 있다. 

과문 탓이지만 ‘정치 불확실성 지수’란 게 있는지 1월의 한국은행 발표를 보면서 처음 알았다. 정치를 지수화 한다는 건, 말을 수로 번역한단 얘기다. 다른 세계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말과 수를 뒤섞는 것 자체가 기이한데, 지수화의 대상이 그중 ‘불확실성’이라니……. 연말의 기이한 사건이, 기이한 수식을 소환했다. 

한국은행이 황급히 대한민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끌어내리던 1월 하순의 흐린 날, 그래도 그 기이한 수식의 쓰임새를 살펴보며 두 가지는 확인했다. 

하나는 지난 두 달 간 대한민국의 모든 불행을 ‘정치적 불확실성’ 탓으로 돌리려는 시도의 과도함이다. 그날 한국은행의 조사국장은 ‘정치 불확실성’과 그에 따른 ‘경제 심리 위축’을 들며 성장률 0.2%의 소실을 말했다. 0.2%가 얼마나 큰 숫자인지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려운 경제를 모두 정치 탓으로 돌려선 안 된다. 그건 어느 쪽엔가 책임 회피의 길을 열어준다. 

말이 아무리 수를 파고 들어 교란해도, 수의 세계는 특유의 맷집으로 수의 원리를 관철시킨다. 연말 연초의 고난도 화두인 환율도 마찬가지다. 환율의 급속한 상승이 모두 ‘정치 불확실성’ 탓은 아니다. 

12월 3일의 파행을 두둔하잔 게 아니다. 경제 분석에서 경제적 요인을 부당하게 배제할 때 생길 리스크를 우려해서 하는 얘기다.

연초 ‘정치 불확실성 지수’를 살피며 확인한 다른 한 가지는 대통령의 지독한 무지다. 대통령은 자신이 자본과 시장에 기대는 현대 국가의 기본 틀을 망가뜨렸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 지난겨울 그는, 오도된 착란의 언어로, 어떻게든 균형을 찾으려 노력하는 수의 세계를 있는 힘껏 무너뜨렸다. 이지형 금융증권부장(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