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배터리 자급 어려움에 ‘중국 천하’ 가능성, K-배터리 3사 위기감 커져

▲ 중국 BYD 창업자이자 CEO인 왕촨푸(왼쪽)가 현지 전기차 제조 공장 투자 발표를 목적으로 8일 튀르키예 이스탄불을 방문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비즈니스포스트] 노스볼트와 메르세데스-벤츠 등이 설비투자를 늦추면서 자체 배터리 생태계를 만들려던 유럽의 시도가 벽에 부딪히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더구나 중국 CATL과 BYD가 유럽 현지에 각각 배터리와 전기차 제조 공장을 구축하며 영향력을 빠르게 확대하는 모습이다. 이에 유럽 지역을 최대 시장으로 둔 한국 K-배터리 3사의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8일(현지시각)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자체 전기차 배터리 생태계를 조성하려던 유럽의 노력이 중국발 공세에 밀려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배터리 전문 컨설팅업체 SC인사이트는 유럽 내에서 계획됐던 배터리 생산설비 프로젝트 가운데 158기가와트(GW) 규모가 올해 들어 6월 사이에 취소되거나 연기됐다고 집계했다. 이는 대략 전기차 200만 대에 탑재할 수 있는 용량이다. 

노스볼트가 스웨덴공장 증설 및 독일에서 공장 신설을 추진하던 일을 최근 연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노스볼트는 유럽연합(EU) 투자은행은 물론 현지 완성차 업체들까지 직접 나서 투자해 유럽을 대표하는 배터리 제조업체로 키우려던 기업이다.

폴크스바겐 배터리 계열사인 파워코 또한 유럽에 지으려던 4번째 공장을 무기한 연기한 것으로 나타났다. 

로이터에 따르면 완성차 기업인 메르세데스-벤츠마저 2030년까지 유럽 4곳을 포함한 전 세계에 8곳의 배터리 공장을 설립한다는 계획을 세웠다가 이를 무기한 연기했다. 전기차 수요 불확실성이 계획을 지연하는 이유로 거론됐다.

로이터는 특히 메르세데스-벤츠가 중국 CATL의 헝가리 공장과 배터리 구매계약을 체결한 점에 주목했다. 유럽 자동차 업체가 자체 배터리 설비 확장안을 미뤄두고 중국 공급사를 선택하는 추세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어서다. 

배터리 공급망의 한 주요 투자자는 파이낸셜타임스를 통해 “유럽은 대규모 금액을 투자해 배터리 산업을 키우려 했지만 이런 계획이 최근 흔들리고 있다”라며 “중국 기업이 아니거나 대기업 지원을 받지 않는 곳들은 다 고사할 것”이라고 바라봤다. 
 
유럽 배터리 자급 어려움에 ‘중국 천하’ 가능성, K-배터리 3사 위기감 커져

▲ 2023년 9월5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국제 모터쇼(IAA)를 찾은 관람객들이 중국 CATL의 전기차용 셴싱 배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 CATL >

유럽의 자체 배터리 생태계 구축 노력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로 중국이 상대적으로 저가인 리튬인산철(LFP) 배터리를 앞세워 유럽 수주 물량을 선점한다는 점이 지목된다. 

유럽 배터리 업체들은 철보다 상대적으로 고가 광물인 니켈과 코발트를 사용하는 배터리에 초점을 뒀었는데 경제성이 나오지 않는다는 판단에 생산을 연기하거나 축소하고 있다.

유럽 배터리 시장에 중국 기업의 공세는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특히 최근 유럽연합의 중국산 전기차 관세 부과 추진의 역효과로 중국 업체들의 유럽 내 생산시설 투자가 활발해질 가능성이 떠오른다. 

BYD가 튀르키예에 10억 달러(약 1조3837억 원)를 들여 전기차 공장을 짓는 일이 대표적 사례다. BYD는 이미 헝가리 남부 세게드(Szeged) 지역에 전기차 공장 신설도 추진하고 있었다. 

이렇듯 유럽에서 중국 전기차 업체의 현지 공장이 늘어나면 자연히 중국산 배터리 판매가 따라 늘거나 배터리 협력사들이 유럽에 추가 공장 설립을 유인할 수 있다.

이는 원래 유럽 시장을 텃밭으로 일구던 K-배터리 3사에 부담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K-배터리 3사 모두 글로벌 시장에서 유럽이 2023년 기준 지역별 매출 비중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의 적극적 진출로 유럽시장을 지키기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럽 전기차 기업들이 중국 LFP 배터리를 채용하는 비중도 점차 증가하는 추세다. 시장 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유럽 전기차 배터리 시장에서 중국 업체들 점유율은 2019년 11.8%에서 2023년 1~7월 기준 40.1%까지 급등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은 2021년 고점인 70.6%를 찍은 뒤 하향세를 보이며 2023년 1~7월 57%까지 내려앉았다.

최근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이 최근 프랑스 르노와 전기차용 LFP 배터리 계약을 맺으며 반격에 나섰지만 이 또한 단독 공급이 아니다. 중국 CATL 역시 르노에 활발히 배터리를 공급하고 있다.

결국 유럽의 배터리 자체 생태계 구축이 벽에 부딪힌 상황에서 시장이 ‘중국 천하’로 빠르게 흐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다만 파이낸셜타임스는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들이 중국 대신 한국 배터리 제조사들에 관심을 보이는 신호들이 관측되고 있어 유럽 시장이 중국과 한국 배터리 기업의 격전지가 될 것이라고 바라봤다. 이근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