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에어컨을 한 대 새로 장만했다. 날이 워낙 더운데 쓰고 있던 에어컨이 구입한 지 7년이 넘은 제품이라 에너지 소비효율이 5등급이었다. 전기료 폭탄이 무서워 요즘 나온 1등급 에어컨으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스탠드형 에어컨 한대 가격은 100만 원이 넘는 고가다. 여름철 한두달 전기요금이 대략 20만 원 이상 나온다고 가정할 때 바꾸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벼룩이 무서우니 초가 삼간을 태우는 것이 됐든 말든 일단 ‘저지르고 보자’고 맘 먹은 것이다.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 병주고 약주는 이상한 나라  
▲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1등급 제품은 인센티브 환급을 받을 수 있다는 가전매장 직원의 말도 혹하게 만들었다. 최종 구입가가 149만 원짜리였는데 신청하면 14만9천 원을 돌려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제품을 설치한 며칠 뒤 환급신청 가능일이 되자마자 해당 사이트에 접속했다. 절차는 간단치 않았다. 제품 라벨 사진을 찍어 첨부파일로 올리고 시리얼 넘버까지 입력해야 했다. 환급 받을 수만 있다면 번거로운 게 문제랴. 어쨌든 모든 신청을 완료했다.

그런데 에너지효율 1등급 가전 인센티브 환급 제도는 9월 말까지만 한시적으로 운영된다. 에너지효율이 높은 제품을 쓰도록 유도하자는 차원에서 도입됐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환급금은 한전 수익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한시적으로 신청을 받다보니 신청자가 벌써 20여 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1인 20만 원 한도인데 한전 지원금은 1300억 원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병 주고 약 주는' 이상한 나라다. 고장도 안 난 제품을 전기요금이 무서워 새로 바꿔야 하고 지난해 11조가 넘는 영업이익을 내는 공기업 한전과 정부는 가정용 전기료 누진제의 개편요구가 빗발치는데도 요지부동이다.

소비자가 고가 가전을 바꾸면 가전회사와 유통회사는 이득을 보게 된다. 시쳇말로 정부가 한전의 돈을 ‘삥 뜯어’ 가전회사 판매고를 늘려주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스럽다.

김용래 산자부 에너지산업정책관은 9일 브리핑에서 “에어컨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면 '요금 폭탄'이란 말은 과장됐다”고 했다. 한마디로 아껴 쓰면 그만이란 얘기니 가뜩이나 들끓는 불만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정부는 누진제를 흔들 경우 사용량이 늘어 수요관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를 편다. 가정용 에너지 사용량이 급증해 에너지 부족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 전기소비량에서 가정용 전기가 차지하는 비중은 13.6%에 불과하다. 누진제 적용을 받지 않는 산업용이 56.6%에 이른다. 이 정도 되면 대국민 사기이자 협박인 셈이다.

김 정책관은 누진제 손질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한전을 상대로 징벌적 누진제를 폐지를 요구하는 집단소송이 8천 세대가 넘는 마당이다.

전기료 누진제 관련 기사에 달린 댓글, 시민단체와 야2당 등 정치권 논의만 봐도 ‘성난’ 민심의 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눈과 귀를 막고 사회적 합의 운운은 가당치도 않다.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 병주고 약주는 이상한 나라  
▲ 조환익 한국전력공사 사장.
정부는 누진제가 개편되면 저소득층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논리도 내세운다. 그러나 이 또한 어불성설이다. 전기 소비량은 소득수준도 중요하지만 세대의 가구수에 좌우되는 측면이 많다.

가정용 전기료 누진제는 단지 전기료를 덜 내려는 차원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개선할 필요가 분명 있다. 절약이 미덕이던 시절에 도입됐던 것이다. 여러 명이 모여야 성냥불을 켜는 것이 미덕이었던 시대는 갔다.

1인 가구가 빠르게 늘고 있고 가전제품은 대형화하는 추세다. 전력을 필요로 하는 가전제품의 수도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 실정이다. 산업용과 가정용 전기료에 대한 형평성에 대한 불만도 크다.

정부와 여당이 올해 폭염만큼이나 부글부글 끓어오른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지난해 야기됐던 제2의 연말정산 사태와 같은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야2당이 이번 논란을 민생의 핵심 이슈로 삼고 있고 새누리당도 정부 방침에 동조하던 데서 한발짝 물러나 7~8월 한시적 누진제 완화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니 정부가 시원한 결단을 내릴지 지켜볼 일이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