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내 주변에 3월 방영 예정인 드라마 '더 글로리' 2부를 기다리는 게 힘들다고 토로하는 이들이 많다. 한 달을 어떻게 기다릴지 답답함을 호소한다.
최근에 넷플릭스에 공개된 영화 '가재가 노래하는 곳'(Where the Crawdads Sing, 올리비아 뉴먼 감독, 2022년 개봉)을 보며 '더 글로리'를 떠올렸다. 부모와 이웃에게 버림받은 소녀가 생존하는 이야기라는 설정이 닮아서일 것이다.
물론 그걸 제외하면 전혀 다른 이야기지만 소녀들이 아주 힘들게 성장하는 건 같다. 출발은 같은데 전개가 사뭇 다른 이 영화도 함께 보면 좋을 것 같다.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한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스타 감독이나 배우가 출연하지 않았지만 입소문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이 영화와 관련해서 이름을 알만한 인물은 제작에 참여한 리즈 위더스푼 정도일 것이다.
소설의 원작자인 델리아 오언스는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한 논픽션으로 유명해진 생태학자로 일흔이 다 된 나이에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을 출간하여 장기간 베스트셀러에 올렸다.
노스캐롤라이나 늪지대에서 부모, 형제들과 살고 있던 카야는 가족에게 버림받는다.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한 엄마와 형제들이 하나둘씩 집을 떠나고 마침내 아버지마저 사라지자 카야는 외딴집에 홀로 남는다. 글도 셈법도 못 배운 카야는 늪에서 홍합을 캐다 팔아서 겨우 입에 풀칠을 한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일종의 법정 스릴러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한데 범인을 찾는데 주력하는 영화는 아니다. 이야기는 1969년 앤드류 체이스가 추락사 하자 용의자로 카야가 지목되면서 시작된다.
일급살인 용의자로 카야는 재판정에 서고 법정 공방이 오간다.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카야의 어린 시절과 그녀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두 남자와의 만남과 이별을 보여준다.
아직 원작을 읽지 못했지만, 아마도 작가의 전문 분야를 십분 살린 습지 생태계에 대한 매력적인 묘사로 가득한 책일 거라 짐작된다. 화면에 담긴 늪지대 풍경과 다양한 동식물 클로즈업은 이 영화가 선사하는 진정한 묘미이다.
1950~60년대 노스캐롤라이나 바클리 코브는 버림받은 카야가 살아가기에는 잔인한 동네였다.
부모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카야를 동네 사람들은 “진화가 덜 된” 존재로 취급했고, 큰 맘 먹고 찾아간 학교에서 아이들은 더럽고 냄새나는 시궁창 쥐라고 놀린다. 거의 유일하게 온정을 베풀어 주는 잡화점 흑인 부부조차 백인 일에 깊이 개입될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소설과 영화 모두 수작으로 평가 받는 소설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1960)와 영화 '앵무새 죽이기'(로버트 몰리건, 1962)에는 백인과 얽혀 곤혹을 치르는 흑인의 처절한 모습이 그려진다.
백인 여자에게 동정심을 느꼈다는 흑인 남성의 말에 동네 사람들은 격분한다. 어떻게 감히 흑인이 백인에게 동정을 느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를 보면 잡화점 부부가 느끼는 막연하지만 근거 있는 공포의 뿌리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알 수 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무엇일까? '더 글로리'의 문동은이 “그리움을 닮은 증오”를 가슴에 품고 “복수”라는 목표를 삶의 동력으로 삼아 어두운 시간을 견뎠다면, 카야는 자연에서 힘을 얻는다. 오해는 마시길...... 착하게 살자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관객으로서 우리에겐 처절한 복수의 서사가 더 매혹적이고 자극적이다. 혼자 남은 소녀의 생존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영화 '윈터스 본'(데브라 그래닉, 2010)이 알려 주는 현실의 혹독함과 비교해도 다소 밋밋한 편이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이 그렇게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서사는 결코 아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습지는 죽음을 통달하고 있다”라는 영화의 마지막 대사의 내공을 이해하게 된다.
글을 배운 카야는 습지 생물들의 학명과 서식지 등에 대한 정보를 찾아서 익힌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하고 관찰한 것들을 그림으로 그린다. 우리는 때가 되면 글을 배워 책을 읽는 과정에서 별다른 감사를 느끼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성장한다.
나는 새삼스럽게 카야가 겪는 놀라운 변화를 보며 글을 읽고 쓴다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생각해 본다. 카야는 자신이 사랑하는 습지의 나무, 새, 곤충에 대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현실을 견뎌냈다.
이 시점에서 내 삶의 중요한 명제 중 하나를 다시금 되뇌어본다. 추구할 대상에 대한 몰입만이 나를 비루한 삶에서 건져 올릴 수 있다. 타인의 호의는 짧고 희미할 확률이 높다. 이현경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