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8월27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를 제28기로 졸업하며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육군 제35사단 사단장, 합동참보본부 작전본부 본부장을 거쳐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맡았다.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뒤 현재 청와대 국가안보실 실장을 맡고 있다.
경영활동의 공과
비전과 과제/평가
◆ 평가
육군사관학교 28기로 군대에 입문한 뒤 35사단장과 2군단장 및 합참의장 등을 맡으면서 정책부서와 야전부대 경험을 고루 쌓았다. 특히 전략과 정책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졌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절 동기생 중 1명만 선발하는 독일 유학시험을 통과해 1969년부터 3년 동안 독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재원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현역시절 독일병정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군에서 일하면서 중간보고를 생략한 ‘원스톱 업무처리’를 도입했다. 추진력이 있고 의사결정을 할 때 소신에 따른 의견을 내놓는 등 강한 리더십과 인화력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듣는다.
부하들이 의견을 내놓을 때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자유롭게 서로의 뜻을 교환하도록 장려한다고 알려졌다. 다만 한번 방향을 정하면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연평도 포격도발 직후인 2010년 12월4일 국방부 장관에 발탁됐다. 육군참모총장 출신 인사들이 주로 맡았던 국방부 장관 자리에 합동참모의장 출신으로 임명된 데다가 전임자인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보다 육사 1기수 선배라는 점 때문에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은 국방부장관에 김관진을 이명박 정부에 추천한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박 의원은 “이재오 당시 특임장관이 추천을 부탁해 김 장관을 추천했더니 임명됐다”며 “김관진 안보실장이 본인 뜻대로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장관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면 훌륭한 국방장관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오 전 새누리당 의원도 박 의원의 추천 사실을 인정했다.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전투형 부대', '정신교육 강화', '관료적 풍토 쇄신'을 화두로 던지며 군 개혁을 추진했다. 2011년 1월 모든 군대에 내린 ‘장관서신 1호’에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임하며 강조한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을 인용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국방부 장관에 내정됐던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비리혐의로 물러나면서 유임됐다. 이를 통해 김관진은 정권교체 후에도 장관에 유임되는 첫 인물이 되었다. 이후 2014년 6월까지 3년6개월 동안 장관으로 일하면서 1987년 이후 자리를 오래 지킨 국방부 장관이 됐다.
북한의 도발에 늘 강력한 대응의지를 밝혀 ‘레이저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북한의 도발원점 및 지휘세력 타격 등 강성발언을 자주 했다.
북한이 가장 싫어했던 국방부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당국은 김관진의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동안 ‘특등 호전광’이나 ‘괴뢰패당 우두머리’ 등 원색적인 용어로 비난했다. 북한은 김관진 얼굴을 사격 표지판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군견이 김관진 이름표를 단 마네킹을 물어뜯는 장면이 조선중앙TV에 나오기도 했다. 2011년 김관진 암살조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국내 언론의 보도도 나왔다. 북한은 윤일병 폭행치사 사건이 드러난 2014년 8월 김관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북 억지력을 높인 반면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에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부 장관 취임 후 군령권(작전, 정보)과 군정권(인사, 군수) 통합을 주축으로 한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재임기간 동안 북한 무인기 발견 및 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의혹사건 등이 발생한 것도 약점으로 지목된다.
2014년 6월1일 박근혜 정부의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내정됐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4년여 간 국방부장관으로 국방을 책임져왔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교안보장관회의의 구성원으로 안보와 외교, 통일 분야 정책결정에 참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11년 국방부 장관 시절 군 비리에 대한 비판이 많아지자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내부공익신고센터를 신설했다. 하지만 신고자 신상을 모두 기록하게 돼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5년간 접수건수는 단 4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10월7일 권은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김관진에게 보고하는 군 인사 관련 첩보문건이 해킹으로 유출됐다고 공개했다. 이 문건은 해킹조직 ‘원전반대그룹’이 해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건에는 “향후 실장님 용퇴설이 확산될 것”이라며 “유XX사건도 야당 국정감사 주제로 잡혔다는 첩보”라는 내용이 담겼다. "연합사 부사령관은 실장님 최악의 작품”, “육사 37기를 군사령관에 등용해야 한다”는 군 장성 인사에 대한 품평도 포함됐다.
야당 의원들은 김관진이 군 인사에 개입하고 한민구 국방장관과 파워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관진은 이 문서은 물론 동향문건을 본적도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한민구 장관 역시 국정감사에서 김관진과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사건사고
경력/학력/가족
◆ 경력
1972년 3월 대한민국 육군 소위로 임관해 32사단 수색중대 소대장으로 처음 보직을 받아 1973년 2월까지 근무했다. 1973년 6월부터 1974년 3월까지 12사단 52연대본부 전투지원중대 소대장, 1974년 3월부터 1976년 1월 종합행정학교 101학군단 교관을 지냈다.
1976년 2월부터 1977년 4월까지 서독에서 전투병과학교 교육을 받고 돌아와 1978년 11월까지 수방사 203 차량화보병대대 3중대장으로 근무했다. 1981년 3월까지 보병학교 전술학처 전술교관을 거쳐 1년간 육군대학 정규과정을 수학하고 대통령경호실에 경호요원으로 파견돼 1983년 10월까지 일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육군 제15보병사단 대대장 및 작전참모로 근무했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대책계획 총괄장교,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국방부 818기획단 법규과장을 거쳐 1990년에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제26기계화보병여단 여단장으로 임명됐다. 1992년 합동참모본부 군사전략과장이 됐다. 1993년 12월부터 1996년 1월까지 대통령비서실 국방담당관을 맡았다.
1996년 7사단 부사단장, 교육사령부 전투개발부 차장을 거쳐 육군본부 비서실장이 됐다. 1998년 육군본부 전략기획처장으로 선임됐다. 1999년 육군 제35사단 사단장이 된 뒤 2000년 육군 기획관리참모부 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2002년 육군 제2군단 군단장이 됐다.
2004년 합동참모본부 작전본부장을 역임했으며 2005년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됐다.
2006년 11월 제33대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의장에 올라 1년4개월 재임한 뒤 2008년 3월 예비역에 편입됐다. 2008년 4월부터 2010년 7월까지 국방과학연구소 비상근 연구자문위원으로 근무했다.
2010년 12월 제43대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2014년 6월부터 지금까지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 실장으로 국가안보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 학력
1968년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69년 독일 육군사관학교로 파견교육을 가 3년 동안 공부한 뒤 1972년 육군사관학교 28기 학사학위를 받았다.
2008년 8월 경희대학교 테크노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 가족관계
부인 김연수씨와 사이에 3녀를 뒀다.
◆ 상훈
1983년 10월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1989년 4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97년 10월 보국훈장 천수장, 2003년 10월 보국훈장 국선장, 2008년 4월 보국훈장 통일장을 차례로 받았다.
2008년 3월25일 합참의장에서 물러나기 직전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정부로부터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공로훈장은 미국 국방부가 외국인에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으로 우리나라 국방장관 가운데 최초 수훈자다.
김관진의 부인 김연수씨도 미국 정부가 주는 우수시민봉사상을 받았다. 김관진은 한국과 미군 병사가 조각된 한미동맹상도 함께 받았다.
◆ 상훈
1983년 10월 보국훈장 삼일장을 받았다. 1989년 4월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1997년 10월 보국훈장 천수장, 2003년 10월 보국훈장 국선장, 2008년 4월 보국훈장 통일장을 차례로 받았다.
2008년 3월25일 합참의장에서 물러나기 직전 한미동맹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정부로부터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공로훈장은 미국 국방부가 외국인에 줄 수 있는 최고 훈장으로 우리나라 국방장관 가운데 최초 수훈자다.
김관진의 부인 김연수씨도 미국 정부가 주는 우수시민봉사상을 받았다. 김관진은 한국과 미군 병사가 조각된 한미동맹상도 함께 받았다.
어록
“북한의 사이버공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각급 기관별 한 치의 빈틈없는 대응체계를 정비, 유사시 국가차원의 체계적이고 일원화된 신속한 대응을 통해 국민들의 사이버 안보 불안감을 최소화해 달라” (2016/12/13, 군 사이버망 해킹과 관련해 국가사이버안보정책조정회의에서)
“국가 안보 문제는 어떤 국내적 상황에도 영향받지 않고 흔들림 없이 추진돼야 한다는 국민들 여망에 한치 빈틈 없이 안보 태세를 유지하겠다.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극단적 도발이 계속되는 엄중한 안보 하에서 국가안보실은 북한 동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2016/12/05, 최순실 국정농단 진상규명 국조특위 청문회에 출석해)
“"북한의 핵 미사일이 위협이 없어지면 사드는 불필요해진다. 사드 레이더는 하루 24시간 가동하는 게 아니다. 북한의 발사징후가 있거나 위기 상황이 있을 때만 가동한다. 기지에서 100m 밖으로 벗어나면 인체 영향이 없다.” (2016/07/13,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사드 배치 결정을 해명하며)
“전시작전권 전환 조건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위협에 대비한 군의 능력 및 한·미 간 대응능력, 북한의 위협에 대한 한국군의 독자적 대비 능력, 전반적 안보 상황이다.” (2014/10/28, 국회운영위원회 안보실 국정감사에 출석해 한국-미국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2월에서 무기한으로 재연기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본의 아니게 집단 따돌림이 GOP 총기사고의 동기가 된 것처럼 오해를 불러와 유가족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2014/06/27, 2014년 6월25일 국회 국방위원회 긴급현안질의 현장에서 제22사단 GOP(일반전초) 총기 난사 사건의 원인을 집단 따돌림으로 돌리는 듯한 발언을 한 것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반발하자 낸 대국민 성명문에서)
“북한이 도발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도발원점을 타격하겠다.” (2012/12/19,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 현장에서 북한이 임진각에서 ‘삐라’를 뿌리면 군사적 타격을 시행하겠다고 밝힌 것에 관한 대응책을 설명하면서)
“작전을 한다면 그 정도의 인명 피해는 감수해야 할 것 같다.” (2011/01/20, 삼호주얼리호 인질 구출 작전을 결정하기 전 이명박 대통령이 인명 피해 가능성을 묻자)
“위기는 곧 기회다. 2011년 새해에 우리 모두가 완벽한 전투태세를 갖추는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세로 적을 압도하는 전투형 부대를 만들어 가자.” (2011/01/03, 장관 취임 후 전군에 내린 첫 ‘장관서신 제1호’에서 창을 베고 적을 기다린다는 뜻으로 늘 전투태세를 갖춘 군인의 자세를 비유하는 침과대적을 인용하며)
“우리는 전쟁을 원하지 않지만 결코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2010/12/04, 국방부 장관 취임식에서 북한이 추가도발하면 자위권 차원에서 강력 응징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 평가
육군사관학교 28기로 군대에 입문한 뒤 35사단장과 2군단장 및 합참의장 등을 맡으면서 정책부서와 야전부대 경험을 고루 쌓았다. 특히 전략과 정책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졌다.
육군사관학교 재학절 동기생 중 1명만 선발하는 독일 유학시험을 통과해 1969년부터 3년 동안 독일 육군사관학교에서 공부하는 등 재원으로 꼽혔다. 이 때문에 현역시절 독일병정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군에서 일하면서 중간보고를 생략한 ‘원스톱 업무처리’를 도입했다. 추진력이 있고 의사결정을 할 때 소신에 따른 의견을 내놓는 등 강한 리더십과 인화력을 모두 갖췄다는 평가를 듣는다.
부하들이 의견을 내놓을 때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자유롭게 서로의 뜻을 교환하도록 장려한다고 알려졌다. 다만 한번 방향을 정하면 그것을 강력하게 추진하는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연평도 포격도발 직후인 2010년 12월4일 국방부 장관에 발탁됐다. 육군참모총장 출신 인사들이 주로 맡았던 국방부 장관 자리에 합동참모의장 출신으로 임명된 데다가 전임자인 김태영 전 국방부 장관보다 육사 1기수 선배라는 점 때문에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박지원 국민의당 의원은 국방부장관에 김관진을 이명박 정부에 추천한 인물이 자신이라고 밝혔다. 박 의원은 “이재오 당시 특임장관이 추천을 부탁해 김 장관을 추천했더니 임명됐다”며 “김관진 안보실장이 본인 뜻대로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장관을 마치고 야인으로 돌아갔다면 훌륭한 국방장관으로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재오 전 새누리당 의원도 박 의원의 추천 사실을 인정했다.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전투형 부대', '정신교육 강화', '관료적 풍토 쇄신'을 화두로 던지며 군 개혁을 추진했다. 2011년 1월 모든 군대에 내린 ‘장관서신 1호’에서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 임하며 강조한 ‘차수약제 사즉무감(此讐若除 死則無憾·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을 인용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뒤 국방부 장관에 내정됐던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이 비리혐의로 물러나면서 유임됐다. 이를 통해 김관진은 정권교체 후에도 장관에 유임되는 첫 인물이 되었다. 이후 2014년 6월까지 3년6개월 동안 장관으로 일하면서 1987년 이후 자리를 오래 지킨 국방부 장관이 됐다.
북한의 도발에 늘 강력한 대응의지를 밝혀 ‘레이저 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국방부 장관으로 일하면서 북한의 도발원점 및 지휘세력 타격 등 강성발언을 자주 했다.
북한이 가장 싫어했던 국방부 장관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 당국은 김관진의 국방부 장관 재임기간 동안 ‘특등 호전광’이나 ‘괴뢰패당 우두머리’ 등 원색적인 용어로 비난했다. 북한은 김관진 얼굴을 사격 표지판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군견이 김관진 이름표를 단 마네킹을 물어뜯는 장면이 조선중앙TV에 나오기도 했다. 2011년 김관진 암살조가 국내에 잠입했다는 국내 언론의 보도도 나왔다. 북한은 윤일병 폭행치사 사건이 드러난 2014년 8월 김관진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대북 억지력을 높인 반면 ‘작지만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에는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국방부 장관 취임 후 군령권(작전, 정보)과 군정권(인사, 군수) 통합을 주축으로 한 상부지휘구조 개편을 추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재임기간 동안 북한 무인기 발견 및 사이버사령부 정치댓글 의혹사건 등이 발생한 것도 약점으로 지목된다.
2014년 6월1일 박근혜 정부의 제2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으로 내정됐다. 당시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4년여 간 국방부장관으로 국방을 책임져왔고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외교안보장관회의의 구성원으로 안보와 외교, 통일 분야 정책결정에 참여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2011년 국방부 장관 시절 군 비리에 대한 비판이 많아지자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내부공익신고센터를 신설했다. 하지만 신고자 신상을 모두 기록하게 돼 있어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5년간 접수건수는 단 4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10월7일 권은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김관진에게 보고하는 군 인사 관련 첩보문건이 해킹으로 유출됐다고 공개했다. 이 문건은 해킹조직 ‘원전반대그룹’이 해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건에는 “향후 실장님 용퇴설이 확산될 것”이라며 “유XX사건도 야당 국정감사 주제로 잡혔다는 첩보”라는 내용이 담겼다. "연합사 부사령관은 실장님 최악의 작품”, “육사 37기를 군사령관에 등용해야 한다”는 군 장성 인사에 대한 품평도 포함됐다.
야당 의원들은 김관진이 군 인사에 개입하고 한민구 국방장관과 파워게임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관진은 이 문서은 물론 동향문건을 본적도 보고받은 적도 없다고 부인했다. 한민구 장관 역시 국정감사에서 김관진과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해명했다.
◆ 기타
박흥렬 청와대 경호실장과 육사 동기다.
2016년 18억5614만 원의 재산을 신고했다. 2010년 국방부장관 인사청문회 때 신고한 13억5198만 원보다 5억 원가량 증가했다.
2016년 3월 북한이 국내 주요 안보 관련 인사 스마트폰 해킹을 시도했을 때 해킹 대상이 됐다. 스마트폰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악성코드를 심는 방식인데 김관진의 스마트폰은 해킹을 당하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