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우디아라비아가 2024년 6월 석유 거래 결제를 달러로만 한다고 미국과 맺은 협정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는다는 '가짜뉴스'가 퍼졌다. 러시아와 중국 주도의 독자적인 국제교역 결제체제도 달러 패권을 위협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22년 12월 22일 러시아 모스크바의 환전소 외부에서 녹은 얼음에 반사된 미국 달러의 기호. <연합뉴스> |
[비즈니스포스트] 지난 6월 중순 국제사회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거래 결제를 달러로 한다는 미국과의 협정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는다는 뉴스가 떠돌았다. 사우디가 1978년 6월8일 미국과 맺은 그런 협정의 50주년을 맞아서 협정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사우디가 석유거래 결제를 달러로 하고, 그 달러를 미국 국채에 투자하기로 한 협정은 미국의 달러 패권에서 중심축으로 여겨졌다. 이 때문에 달러 체제를 떠받는 페트로달러(석유와 달러의 영어 합성어)라는 말도 생겼다.
그런 협정이 이제 유효하지 않다면, 달러 체제와 미국 패권에 심대한 영향을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뉴스들은 대부분 페트로달러의 종말, 달러 패권의 균열, 더 나아가 미국 패권의 몰락이라는 표현과 평가를 담으며 이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뉴스가 로이터 등 국제 통신 등 주요 매체에는 보도되지 않았다. 비주류 뉴스매체나 소셜미디어에 떠도는 이 뉴스에서는 사우디의 이런 조처를 발표하는 주체나 당국자도 언급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 뉴스는 ‘가짜 뉴스’이다. 사우디와 미국은 그런 협정을 공식적으로 맺은바가 없다. 그래서, 협정을 연장하거나 만료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뉴스가 함축하는 의미는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1974년에 사우디와 미국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가?
1974년 6월8일 헨리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사우디의 제2부총리인 파드 왕자(뒤에 왕이 된다)는 미국-사우디경제협력합동위원회 설치 협정에 서명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이 협정은 국가 사이의 일반적인 경제협력에 관한 것으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사우디가 자국 석유를 판매할 때 달러만 받기로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과 사우디 사이에서는 석유 거래와 관련한 아무런 합의나 묵계는 없었다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키신저와 파드의 양국 경제협력 체결 뒤 약 한 달 뒤 윌리엄 사이먼 당시 미 재무장관은 사우디를 방문해, 문제의 ‘가짜 뉴스’가 언급한 비밀 합의를 했다.
당시 사이먼 장관은 유럽 순방을 하던 중 사우디에 나흘 동안 들려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은밀한 명령을 수행했다. 즉, 당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4차 중동전쟁에서 미국의 이스라엘 지원에 항의해 서방에 석유 수출을 금지하면서 석유값이 4배나 폭등한 오일쇼크 위기를 미국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석유를 경제무기화하지 못하게 하는 한편 미국의 재정적자 해소에 석유를 판 사우디의 풍부한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 방안의 기본틀은 간단했다. 미국은 사우디로부터 석유를 사고 사우디에게 군사 지원을 한다. 그 대신에, 사우디는 미국으로부터 받은 석유판매 대금으로 미국 국채를 사줘서 미국의 재정을 도와주는 것이다.
이는 양국에게는 윈-윈 게임이었다. 미국을 사우디로부터 석유가 필요했고, 사우디에 대한 군사지원도 중동 안보에서 필요한 일이었다.
사우디는 미국 등에게 석유를 판 천문학적 돈을 사실 미 국채 외에는 딱히 안전하게 투자할 대상도 없었다. 달러는 전후 국제사회의 기축통화였기에 이미 석유 거래 결제에는 달러가 압도적이었고, 미 국채 매입을 위해서는 달러로의 결제가 더욱 필요했다.
양국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으나,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슬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과 밀착하는 모습이 공개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 때문에 파이잘 당시 사우디 국왕은 사우디의 미 국채 매입을 “엄격하게 비밀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때문에 당시 미국과 사우디의 합의는 공식적으로는 비밀로 유지됐다.
그래서, 사우디의 미 국채 매입과 그 규모를 미 재무부는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사우디의 미 국채 매입은 별도의 통로로 이뤄졌다. 외국의 미 국채 보유 통계 발표에서는 ‘석유 수출국’이라는 범주에 사우디 등 아랍 국가뿐만 아니라 나이지리아까지 넣어서 처리됐다.
하지만, 당시 양국의 이런 은밀한 합의는 곧 '공개된 비밀'이 됐다. 페트로달러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사이먼 재무장관의 사우디 방문 때 양국의 비밀합의는 2016년 블룸버그가 정보공개법에 따라 요청해 받은 당시 기록을 보도하면서 공개적으로 확인됐다.
블룸버그는 ‘41년이 된 사우디아라비아의 미국 채권 비밀 막후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라는 기사로 사이먼의 사우디 방문과 그 비밀합의를 보도했다.
어쨌든 당시 양국의 이런 은밀한 합의는 압도적 군사력과 함께 달러 체제에 큰 기여를 했다. 군사력과 달러 체제는 미국 패권의 양대 축을 이룬다.
1973년의 오일쇼크에 앞서 1971년에 미국은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재정적자가 커지자,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는 금태환 정책을 포기했다. 이 조처로 달러의 위상과 가치가 추락한 상황에서 오일쇼크까지 터지면서 미국 경제가 공황에 준하는 사태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이 조처로 인해 사우디 등 산유국들의 페트로달러가 미국으로 환류하면서, 미국은 재정적자를 메꿔주는 국채를 무난하게 발행할 수 있었고, 달러의 위상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우디가 석유 거래를 달러로만 한다는 협정을 종료했다는 잘못된 뉴스가 나온 배경은 최근 달러 체제에 대한 거센 도전이 자리잡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중국과 러시아가 탈달러 결제 체제 구축을 시도하고 있으며, 디지털화폐 체제도 들어서고 있다.
달러는 여전히 국제교역에서 결제 수단으로서 압도적 위상을 유지하고 있으나, 각국의 외환보유고에서 그 비중은 많이 줄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99년 달러는 각국의 외환보유고에서 비중이 약 71%였는데, 현재 58.4%로 줄었다.
페트로달러를 주도했던 사우디 입장에서는 자국 석유의 최대 구매국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미국은 여전히 사우디 등 중동의 석유를 수입하기는 하나, 셰일 에너지 개발로 석유수출국으로 바뀌었다.
반면, 중국은 사우디가 수출하는 석유의 20% 이상을 구매하고 있다. 사우디로서는 미국과 달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체제보다는 다변화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서방이 러시아에 가한 전례없는 제재와 이에 맞서는 중국과 러시아 주도의 독자적인 국제교역 결제체제 구축 시도는 달러 체제의 존속 여부를 가르는 시험대가 되고 있다.
러시아는 자국 석유 등 원자재를 중국에 팔고, 중국은 러시아에게 각종 상품을 파는 윈-윈 교역 체제를 구축하며 위안-루블화로 거래하고 있다. 러시아-인도, 중국-브라질 교역에서도 자국 통화 결제가 시행되고 있다.
사우디 역시 중국과 석유 거래에서 위안화 결제를 일부 수용하고 있다. 사우디는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중-러가 주도하는 브릭스의 새로운 회원국으로 승인됐으나, 가입 여부를 최종 확정하지는 않았다.
달러 패권에 결정적인 페트로달러를 주도했던 사우디는 지금 미국 등 서방과 중-러 진영 사이에서 조심스런 등거리 외교를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달러 의존을 줄여나가고 있다.
페트로달러 체제의 약화와 관련해 최근에 실제로 중요한 뉴스가 있었다. 사우디는 지난 6월5일 중국이 주도하는 각국 중앙은행들의 디지털화폐 국경간 거래 프로젝트에 참가를 발표했다. 지난 2021년 중국, 아랍에미리트연합 등이 시작한 ‘프로젝트 엠브릿지’에는 현재 135개국 및 유럽연합 등이 참가하고 있고, 국제결제은행(BIS)이 감독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각국의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를 국제교역에서 결제수단으로 사용하는 방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다. 성사된다면, 달러의 위상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국제결제은행은 사우디의 완전한 참가로써 이 프로젝트가 “최소한의 실행가능한 상품 단계”로 진입했다고 발표했다. 로이터도 사우디의 참가로 석유의 달러 거래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한걸음이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페트로달러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이던 사우디가 통화 다변화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탈달러로 가는 작지만 상징적인 걸음이 아닐 수 없다. 달러의 지배적인 위상은 가까운 장래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러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도 국제결제에서 비달러화나 자국 통화를 이용한 결제를 시도하고 있고, 이는 해당 국가들에게 큰 이익이 아닐 수 없다.
사우디가 석유 거래에서 달러만을 쓴다는 협정을 종료했다는 ‘가짜 뉴스’는 어쩌면 기로에 선 달러 체제를 드러내는 징후라고도 할 수 있다. 정의길/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