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의 말은 무겁다. 하물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처럼 한국 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의 말은 무거움에다 천금 같은 귀중함이 더해진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2월25일 삼성SDI가 보유하고 있던 삼성물산 주식 3천억 원어치를 매입했다. 이날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재용 부회장도 삼성SDI가 보유하던 삼성물산 주식 2천억 원어치를 사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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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삼성물산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회사다. 이 부회장이 최대주주다.
이런 삼성물산의 주식을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사들인 것은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 지배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우호지분을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삼성SDI가 삼성물산 주식을 팔아야 했던 이유는 지난해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서 새로운 순환출자 고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순환출자를 해소하기 위해 이재용 부회장과 삼성생명공익재단이 나서 삼성물산의 주식을 매입한 것이다.
삼성물산 주식이 대거 시장에 나올 경우 던질 충격 등을 감안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며 했던 말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이 크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5월 삼성생명공익재단 이사장에 취임하면서 “앞으로 경영권 지배나 행사를 위해 재단이 계열사 주식을 추가로 취득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을 편법으로 승계할 것이라는 우려를 잠재우기 위한 ‘약속’이었을 것이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당시 공식자료를 통해 “상속 관련 세금은 법이 정하는 대로 투명하고 당당하게 납부한다는 것이 이재용 부회장의 확고한 생각”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부회장이 천금 같이 무거운 말을 어긴 꼴이 됐다.
경제개혁연대는 “이 부회장을 위한 무리한 합병이 신규 순환출자 형성으로 이어지고 법을 위반하게 되자 공익재단의 자금을 동원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삼성물산 주식 매각의 본질”이라고 비판했다.
경제개혁연대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이기 위해 사용한 현금 3천억 원의 출처를 놓고도 문제를 제기했다.
고 이병철 회장의 넷째사위인 이종기 삼성화재 회장이 2006년 10월 일본의 한 호텔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이종기 회장 사후 2개월이 지나 갑자기 ‘그동안 아무도 모르게 보유해 왔던 삼성생명 주식 4.7%(936만주)를 삼성생명공익재단에 기부한다’는 유서가 나왔다.
삼성재단은 이 주식 가운데 500만주를 2014년 6월20일 매각해 현금 5천억 원을 장만했다. 이 돈 가운데 3천억 원이 이번 삼성물산 주식 매입에 사용됐다고 경제개혁연대는 주장한다.
이병철 회장의 차명주식이 이 부회장의 삼성그룹 승계에 활용됐다는 의혹인 셈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문제는 이종기 회장이 기부한 주식이 이건희 회장의 불법재산 승계에 활용됐던 차명주식이라는 것”이라며 “삼성 특검은 이종기 회장의 주식을 차명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전형적인 부실수사임이 나중에 밝혀졌다”고 지적했다.
김 소장은 “결과적으로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인 돈 자체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라며 “삼성그룹이 이 부회장 시대는 과거와 달라졌다는 메시지를 줘야 하는데 아직 그런 의지가 확고하지 않은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언젠가 “재벌은 총수와 관련된 일에 관해서는 이성을 잃는 집단”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삼성물산 주식을 사들인 사실을 보면서 이 말이 다시 떠오른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