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징후를 간과하고 국제정세 변화에 둔감했던 조선은 임진왜란 초기 무기력한 패배를 거듭했다. 쓰라린 역사를 교훈 삼아 환경변화를 적기(適期)에 포착해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허창수 GS그룹 회장은 지난 15일 그룹 계열사 경영진 150명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허 회장은 “징비록의 정신으로 재무장해야 한다”며 선제대응을 경영의 화두로 제시했다.

한상범 LG디스플레이 사장은 17일 파주 임진각에서 열린 임직원 단합 행사에서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을 본받아 철저한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무장하고 임직원 모두가 하나가 돼 반드시 2015년 목표를 달성하자”고 강조했다.

  우리는 왜 징비록에 열광하는가  
 
국내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이 '징비록' 정신을 강조하고 나섰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경영환경을 정신력으로 무장해 극복하자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징비록은 조선 선조때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을 생생하게 기록한 책이다.

'난중일기'와 함께 임진왜란을 다룬 최고의 기록물로 꼽힌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국토를 피로 물들이고 수많은 백성의 목숨을 앗아간 임진왜란의 참상은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여기저기서 ‘징비록’ 바람이 거세다. KBS1 대하드라마 ‘징비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지난해 영화 ‘명량’의 인기에 힘입어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가 큰 주목을 받더니 올해는 징비록이 바통을 이어받는 모습이다. 

출판계에도 징비록 붐이 일고 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 출간된 징비록 관련서는 모두 네 권이다. '징비록: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김흥식 번역, 서해문집 출간)은 2013년 출간됐다가 지난해 말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나온 번역서다.

‘소설 징비록’(이재운 저, 책이 있는 마을)은 정사를 소설적 상상력과 함께 역사소설로 재구성한 책이다.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배상열 저, 추수밭)은 류성룡의 원작을 이해하기 쉽도록 오늘날의 시각에서 풀어썼다.

앞의 세권과 달리 ‘류성룡, 7년의 전쟁’(이종수 저, 생각정원)은 당대 최고의 정치인이자 지식인이었던 개인 류성룡에 초점을 맞췄다. 참혹한 전쟁의 실상 앞에선 류성룡의 인간적 고뇌와 결단을 평전 형식으로 담아냈다.

우리사회는 왜 이토록 징비록에 열광할까?

그 이유는 딱 한 가지만 짚어 말하기 어렵다. 적어도 드라마의 인기나 징비록 자체의 가치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은 역사기록물이면서도 전쟁의 시작과 중간과 끝을 낱낱이 파헤친 고발서이기도 하다.

류성룡의 징비록이 난중일기와 다른 점은 전쟁이 끝난 뒤에 쓰였다는 점이다. 류성룡은 영의정에 올라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하도록 해 패색이 짙던 전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초라했다.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됐기 때문이다. 징비록은 이런 상황에서 쓰였다. 과거의 통한과 참회의 기록인 것이다.

  우리는 왜 징비록에 열광하는가  
▲ ‘류성룡, 7년의 전쟁’ 저자 이종수씨
징비록의 ‘징비’란 ‘시경’의 “내가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류성룡이 징비록을 통해 남기고 싶은 것은 과거를 망각하지 않고 기억해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는 우리 사회가 얼마나 빨리 망각하고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징비록 현상은 이 시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질 줄 아는 류성룡 리더십에 얼마나 목말라하고 있는지도 여실히 보여주는 듯하다.

‘류성룡, 7년의 전쟁’에서 류성룡의 인간적 면모에 주목한 저자 이종수씨는 류성룡을 이렇게 정의한다. “잘못을 솔직히 말하는 게 쉽지는 않은데 류성룡은 잘못을 인정했던 영의정이었다. 그것이 류성룡의 남다른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최근 성완종 리스트 파문 이후 이완구 국무총리를 비롯한 우리 사회의 리더를 자처하는 정치인들의 언행은 참 씁쓸하다.[비즈니스포스트 김수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