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경배 아모레퍼시픽홀딩스 대표이사 회장이 승계 구도에서 차녀 서호정씨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사진은 2023년 9월4일 진행된 아모레퍼시픽그룹 창립 78주년 기념식에서 서 회장이 기념사를 전달하는 모습.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업계에서는 서호정 씨가 그룹 내 첫 공식 직책을 맡은 것을 두고 승계 구도가 분기점을 지나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지분율 격차가 크지 않은 자매 구도에서 장녀는 실무에서 한발 비켜섰고, 차녀는 경영현장에 이제 막 발을 들였다. 조용히 흐르던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세대교체 시계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3일 아모레퍼시픽에 따르면 서경배 회장의 차녀 서호정씨가 7월1일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자회사 오설록의 상품개발팀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향후 제품 개발과 마케팅 업무에 투입돼 실무 감각을 쌓게 된다.
1995년생인 서 씨는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실무 첫 행선지로 선택한 오설록은 규모보다 상징성이 큰 계열사로, 실무 교육의 전초기지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아직 그룹 내 실무 경험이 전무한 만큼 오설록에서 기초를 다진 뒤 핵심 계열사인 아모레퍼시픽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점쳐진다.
반면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았던 장녀 서민정씨는 2023년 7월부터 장기 휴직 상태이다. 서민정씨는 코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글로벌 컨설팅사 베인앤컴퍼니를 거쳐 2017년 아모레퍼시픽에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중국에서 MBA 과정을 마친 뒤 2019년 과장급으로 재입사했다.
하지만 두 차례 입사와 짧은 재직, 결혼과 이혼 등을 거치며 그룹 내 존재감은 예전보다 옅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 안팎에서는 서민정씨가 서 회장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승계 주도권 확보에도 사실상 실패했다는 시선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다.
아모레퍼시픽 관계자는 “서민정씨는 현재 의원 휴직을 통한 장기 휴직에 들어간 상태”라며 “의원 휴직에 대한 휴직 기한은 1년이나 개인의 사유가 인정될 경우 추가 휴직을 허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지분 흐름을 보면 서경배 회장과 서민정씨 사이에 일정한 거리감이 형성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된다.
서민정씨는 2012년 서 회장으로부터 에뛰드 주식 14만1791주(지분율 19.5%), 에스쁘아 3만9788주(19.5%), 이니스프리 4만4450주(18.18%)를 증여받으며 유력한 후계 후보로 주목받았다. 당시 해당 지분은 승계 자금의 실탄이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실제 서 씨가 이니스프리에서 2015년부터 2022년까지 배당으로 수령한 금액은 508억 원에 이른다.

▲ 아모레퍼시픽의 승계 구도에서 서호정씨(오른쪽)가 언니 서민정씨보다 우위를 점했다는 시선이 제기된다.
하지만 흐름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서 씨는 2022년 9월 에뛰드와 에스쁘아 지분을 전량 처분했다. 해당 주식은 각각 무상감자와 유상감자 방식으로 소각됐다. 이어 2023년 6월에는 자신이 보유하던 이니스프리 지분 2만3222주(9.5%)를 서경배과학재단에 기부하며 사실상 증여받은 지분의 절반을 내려놓았다.
일각에서는 서민정씨가 계열사 지분을 잇달아 정리한 것을 두고 승계 경쟁에서 한발 물러섰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당초 후계를 위한 포석으로 여겨졌던 지분이 처분되며 승계 구도가 다시 안개 속으로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가운데 서경배 회장이 차녀 서호정씨에게 주식을 증여하며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리는 분위기다. 서 회장은 2023년 5월 서호정씨에게 아모레퍼시픽그룹 보통주 67만2천 주와 우선주 172만8천 주를 증여했다.
현재 아모레퍼시픽홀딩스의 지분율은 서민정씨가 2.75%, 서호정씨가 2.55%로, 두 자매 간 지분 격차는 불과 0.2%포인트에 불과하다. 지분 구조만 놓고 보면 사실상 동일 선상에서 승계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다만 지분이 비슷하더라도 실질적인 경영 참여 수준에는 뚜렷한 온도차가 있다고 지적된다.
서민정씨는 장기 휴직 상태에 머물고 있는 반면 서호정 씨는 이제 막 실무에 투입돼 현장 감각을 익히기 시작한 단계다. 입사 시점만 놓고 보면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오히려 서민정씨 중심으로 짜였던 승계 구도에 균열이 생긴 결과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물론 서경배 회장이 공식적으로 승계 방침을 밝힌 적은 없다. 다만 지분 증여 시점과 자녀들의 실무 이력 변화는 결코 가볍지 않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평가된다. 단순히 ‘이름 올리기’를 넘어 실제 조직 안에서 역할과 경험을 쌓는 자녀에게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아직 후계 구도를 논하기엔 이르다는 신중론도 여전하다.
서 회장은 1963년생으로 여전히 현역 경영을 이어가기에 충분한 나이다. 게다가 현재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지분 48.7%를 보유하고 있어, 지배력 측면에서 절대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장녀와 차녀의 지분율은 각각 2%대에 불과한 만큼 아직까지 승계에 대한 사항을 단정 짓기는 어렵다.
한 업계 관계자는 “아모레퍼시픽그룹의 승계 구도는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지켜봐야 한다”며 “서 회장의 차녀가 이제 막 입사한 만큼 아직은 실무 감각을 더 쌓아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 김예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