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저널] 채형석 꿈꾸는 애경그룹의 항공으로 대전환, 덩치 키우다 몰락한 팬암의 교훈

▲ 4년 내 1천억 원 매출을 목표로 잡았던 제주항공은 한 해에 거의 2조 원의 매출을 내는 국내 1위 저비용항공사로 자리를 잡았다. 제주항공이 최근 저비용항공사 업계의 합종연횡으로 경쟁사들의 추격에 직면해 있다. <그래픽 씨저널>

[씨저널] 300억 원과 1조9358억 원. 

제주항공의 취항 첫해인 2006년 목표 매출과 2024년 매출이다. 4년 내 1천억 원 매출을 목표로 잡았던 제주항공은 한 해에 거의 2조 원의 매출을 내는 국내 1위 저비용항공사(LCC)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런 제주항공의 성장에 발맞춰 애경그룹은 ‘생활’에서 ‘항공’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다. 

특히 애경그룹이 애경산업의 매각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채형식 애경그룹 총괄부회장이 그룹의 체질을 제조업과 소매업 중심에서 항공업 중심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애경산업은 장영신 회장이 손수 일군 생활용품 기업이자, 그룹의 모태라 불리는 핵심 계열사다. 그런 회사를 내려놓는다는 선택을 검토하고 있는 것은 그룹 정체성 자체를 바꾸는 신호탄이라는 해석이 재계 안팎에서 제기된다.

◆ ‘생활’을 정리하고 ‘항공’에 베팅한 채형석

애경산업은 오랫동안 그룹의 안정적인 현금창출원 역할을 해왔다. 세제·화장품·생활용품이라는 ‘필수재’ 위주의 사업구조는 경기 변동에도 비교적 영향을 덜받았으며 유통업을 담당하고 있는 AK플라자와 함께 애경그룹의 정체성을 소비자와 매우 밀접하게 닿아있는 ‘생활 기업’으로 규정짓는 데 큰 지분을 차지해왔다.

하지만 최근 애경그룹이 유통산업의 침체, 항공산업의 고비용 구조, 화학 부문의 시황 둔화라는 악재 속에서 유동성 위기를 겪으면서 채형석 부회장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채 부회장은 기업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애경산업을 지키면서 위기를 조금씩 헤쳐나가느냐, 혹은 애경산업을 매각하고 그 자금으로 단숨에 위기를 탈출한 뒤 그룹의 체질을 완전히 변화시키느냐의 두가지 길 중에 후자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이유에서 애경산업의 매각이 완료되면 제주항공을 중심으로 애경그룹의 투자와 전략적 자원이 빠르게 재편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애경산업 매각을 통해 확보한 유동성은 항공업계 인수전, 혹은 기단 확대의 실탄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다.

◆ 제주항공, ‘덩치 경쟁’의 한가운데에 서다

저비용항공사(LCC) 업계는 지금 대격변의 한가운데에 있다. 진에어·에어서울·에어부산의 합병으로 초대형 LCC가 출현을 앞두고 있으며, 티웨이항공과 에어프레미아의 결합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현재 LCC 업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주항공으로서는 단숨에 ‘덩치’에서 밀릴 수 있는 위기에 직면한 셈이다.

항공업 특성상 기재 운영, 슬롯 확보, 인력 구성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만큼, 경쟁사 대비 몸집이 작아지면 비용 구조와 수익성 측면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이사도 2023년 7월 임직원 메시지에서 “M&A 기회가 왔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향후 항공사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 팬암이 남긴 교훈, 덩치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덩치 키우기’가 항공사 사이의 경쟁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단의 확장이나 인수합병을 통한 덩치 키우기가 반드시 항공 사업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팬아메리칸항공(팬암)의 몰락은 무리한 확장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팬암은 미국 항공산업의 선구자이자 1900년대 중반 미국의 하늘길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항공사다. 전성기에는 맥도날드에 비견될 정도로 세계적 기업이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급격하게 수익성이 악화되기 시작했고, 이를 극복하고 다시 흑자가 나기 시작하자 팬암은 후발주자들의 추격을 견제하고 규모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1980년 내셔널항공 인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팬암을 몰락의 길로 이끌고 말았다. 팬암의 덩치는 순식간에 커졌지만 이미 1970년대 위기를 헤쳐왔던 팬암은 커진 덩치에 따른 막대한 고정비 지출과 수익성 악화를 견딜 수 없었다. 결국 팬암은 이때 받은 타격을 끝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1991년 12월4일 마지막 비행을 끝으로 파산하고 말았다. 

팬암의 사례가 특히 의미있는 것은 1980년 팬암의 상황과 현재 제주항공의 상황이 놀랍도록 비슷하기 때문이다.

팬암이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연속 적자를 냈고 1970년 후반부터 겨우 흑자를 회복한 것처럼 제주항공 역시 코로나19를 겪으면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4년 연속 적자를 냈다가 2023년부터 흑자로 다시 돌아섰다. 

또한 팬암이 델타항공, 아메리칸항공, 유나이티드항공 등 후발주자들의 거센 추격에 직면했던 것처럼 제주항공 역시 LCC 업계의 합종연횡에 쫓기고 있다. 
 
[씨저널] 채형석 꿈꾸는 애경그룹의 항공으로 대전환, 덩치 키우다 몰락한 팬암의 교훈

▲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이사는 시아나항공에서 전략기획본부장, 경영관리본부장 등을 지낸 재무전문가이자 항공기획전문가로 항공업계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신중하고 실용적 경영 스타일의 소유자다. <그래픽 씨저널>

◆ 항공 중심의 전환, 제주항공이 짊어진 그룹의 미래

채형석은 애경그룹의 ‘대전환’을 통해 제주항공의 어깨 위에 그룹을 올리려 하고 있다. 과거 그룹 전체의 기둥 역할을 했던 애경산업을 정리하게 된다고 가정했을 때, 항공이 새로운 중심이 되지 못한다면 애경그룹 전체의 존립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문제는 코로나19, 노재팬 운동 등에서 보듯이 항공업은 특성상 외부 변수에 크게 휘둘리는 산업이라는 점이다. 국제유가, 환율, 안전 문제, 노선 경쟁, 국제 정세 등 예측 불가능한 요소가 언제 발생할지 모른다. 회사에 재무적 부담을 안겨줄 수 있는 인수합병이나 투자 확대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제주항공 역시 무리한 인수와 확장보다는, 재무 건전성과 시너지 가능성을 따진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제주항공 수장을 맡고 있는 김이배 제주항공 대표의 이력도 주목된다. 그는 아시아나항공에서 전략기획본부장, 경영관리본부장 등을 지낸 재무전문가이자 항공기획전문가로 항공업계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신중하고 실용적 경영 스타일의 소유자다. 

특히 아시아나항공 한정승인 사태의 책임을 지고 나온 회사를 나왔던 만큼, 재무적 부담이 회사를 어떻게 망가트릴 수 있는지와 관련해 상당히 신중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유통업계의 한 관계자는 “애경산업 매각은 채형석 부회장이 항공업에 ‘올인’하겠다는 신호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기둥이었던 애경산업과 제주항공은 사업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라며 “안정적 사업구조를 보여줬던 애경산업을 대신해 제주항공이 그룹의 기둥 역할을 하려면 확장과 내실이라는 두 축이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윤휘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