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회장은 이런 성과에 대한 보상뿐 아니라 이번 인사에서 미래 모빌리티 전략을 이끌 새로운 리더 발탁에도 주안점을 뒀다.
이번 인사에서 미래 최고경영자(CEO) 역할을 수행할 후보군으로 볼 수 있는 부사장·전무 승진자는 모두 48명이다. 이를 놓고 현대차그룹은 "중량감 있는 핵심리더 확보에 중점을 둔 최근 수년 동안의 인사 기조를 이어감으로써 그룹의 지속가능성을 높였다"고 강조했다.
이번 임원인사에는 정 회장의 새로운 '품질 최우선' 경영 철학을 수립하고자 하는 의지도 담긴 것으로 분석된다.
현대차그룹은 차량 안전·품질 관리 철학의 근원적 변화를 추진하겠다는 취지로 브라이언 라토프 부사장을 사장으로 승진시켜 현대차·기아 글로벌 최고 안전 및 품질책임자(GCSQO)로 임명했다.
라토프 사장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기계공학 학사 및 석사 과정을 마치고 2019년 현대차 북미법인에 합류하기 전까지 27년 동안 제너럴모터스(GM)에서 근무한 차량 안전 전문가다. 2014년 GM은 대규모 리콜 사태를 맞았는데 당시 GM의 내부 안전 체계를 재편한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해부턴 현대차 글로벌 최고안전책임자를 맡아 엔지니어링 전문성과 고객 중심 품질철학을 기반으로 신속한 시장조치를 실시하면서 현대차의 브랜드 신뢰도를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라토프 사장은 앞으로 GCSQO로서 현대차·기아의 차량 개발부터 생산, 판매 이후까지 모든 단계에서의 품질 관리 정책을 총괄하는 임무 수행하게 된다. 현대차그룹은 새로운 품질 철학이 빠르게 확산할 수 있도록 관련 기능을 담당 조직인 GSQO(글로벌 안전 및 품질 조직) 아래에 두는 조직 개편도 예고해 뒀다.
이를 통해 현대차그룹은 기존 내연기관차뿐 아니라 전기차를 포함한 미래차 품질관리에 힘줄 것으로 예상된다.
전기차는 현대차그룹이 그리는 목적기반모빌리티(PBV), 수소 모빌리티, 도심항공모빌리티(UAM) 로보틱스 등 미래모빌리티의 시작점이다.
정 회장은 라토프 사장의 승진 및 GCSQO 선임과 조직개편을 통해 전기차 시대엔 한 단계 높은 품질경영을 펼쳐 선제적으로 강건한 브랜드 위상을 확립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동석 현대차 국내생산담당 겸 안전보건최고책임자 대표이사 부사장은 현대차의 5년 연속 무파업과 최대 생산 실적을 이끈 성과를 인정 받아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 사장은 작년 3월부터 생산 및 안전 관련 업무를 총괄하며 정 회장, 장재훈 현대차 사장과 함께 현대차의 3인 대표이사 체제를 이끌어 왔다.
현대차와 기아의 단체협약은 해외 공장 시설투자 및 해외 생산 차종의 수출 등으로 국내 공장 조합원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때는 노사 사이 합의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히 내년 연말 준공하는 미국 조지아주 전기차전용공장(HMGMA)를 비롯한 대규모 전기차 설비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는 현대차그룹에 있어 안정적 노사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한 상황이다.
정 회장은 지난달 울산 전기차 공장 기공식 행사에 참석한 뒤 기자들과 만나 글로벌 전기차 수요가 줄어드는 가운데도 공격적 투자를 유지하는 이유에 관한 질문에 "기존에 해왔던 투자고 코스트(비용) 절감이나 이런 여러가지 방법도 있겠지만 큰 틀에서 어차피 전기차 수요는 계속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운영을 묘를 살려서 해 볼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일시적 이슈보다 장기적 전기차 수요 확대에 대한 확신을 갖고 계획된 투자를 그대로 진행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반면 최근 글로벌 전기차 수요 둔화 우려 속 대부분 글로벌 완성차업체들이 전기차 관련 투자 속도조절에 나서고 있다.
이에 증권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이 2~3년 뒤 전기차 부문에서 한발 더 앞서나갈 기회를 잡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다만 이 역시도 안정적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생산에 차질이 없는 경우를 전제로 한 때 가능한 얘기다.
현대차그룹에 있어 최근 5개년 무파업 성과는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한 성과보다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대차노조는 올해 노조지부장 선거에서 기존에도 강성이었던 전임보다 더 강성으로 평가받는 집행부를 선출해 뒀다.
정 회장으로선 사장으로 승진한 이 사장에게 거는 기대가 클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현대차그룹 임원 인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강해진 세대교체 바람이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차 인사를 총괄하는 HR본부장 자리에 올해 49세(1974년생)인 BAT 최고인사책임자(CHRO) 출신 김혜인 부사장을 새로 영입했다.
김 부사장은 IBM, PWC 등 컨설팅 회사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BAT코리아 인사관리 파트너로 영국에 본사를 둔 BAT그룹에 합류했다. 그 뒤 BAT재팬 인사총괄, BAT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 인사총괄 등을 역임하여 글로벌 경험을 두루 갖춘 인사관리 전문가다.
김 부사장을 비롯해 전체 승진 임원 가운데 신규선임 임원은 총 197명인데 그 가운데 38%를 40대에서 발탁했다. 신규 임원 가운데 40대 비중은 2020년 21%에서 2021년 30%를 넘어선 뒤 지난해 35%로 지속 높아지고 있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지난달 17일 대표이사 및 사장단 인사에선 경기 침체 및 전쟁 등 불확실한 경영환경을 고려해 현대제철과 현대모비스 단 두 계열사의 대표이사만을 신규선임하며 '안정성'에 방점을 찍은 바 있다.
이런 기반 위에서 정 회장은 이번 대규모 임원 승진 인사를 통해 차기 리더 발탁과 미래모빌리티 시대를 이끌 '젊은 피'를 대거 새로 선임함으로써 미래를 바라보는 인사를 단행한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번 임원 인사는 '2025 스마트 모빌리티 솔루션 프로바이더' 전략 달성과 2030년을 준비하기 위한 리더십 강화를 위한 것"이라며 "그룹의 미래 사업 전환을 위해 변화와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인재에 과감한 투자 및 인사를 지속 이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