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교장은 18세기 초엽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 선생이 처음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뒤로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세거해온 고옥이다. <문화재청> |
[비즈니스포스트] 강릉의 명승지인 경포호 근처에 선교장이란 명소가 있습니다.
선교장은 18세기 초엽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 선생이 처음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뒤로 후손들이 10대에 걸쳐 300년 동안 세거해온 고옥입니다. 선교장의 규모는 매우 방대하여 4000평이 넘는 대지에 많은 건물들이 세워져 대장원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규모도 방대하고 조선시대 전통한옥의 빼어난 기품을 잘 보여주는 건물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1967년 국가에서 선교장을 국가 민속문화재 5호로 지정했습니다.
선교장은 민간 가옥으로서는 최초로 국가 민속문화재가 되었습니다. 2000년에는 한국방송공사가 선교장을 한국 최고의 전통가옥으로 선정했습니다.
이내번 선생은 1693년 충주에서 효령대군의 10대손인 아버지 이주화 선생과 어머니 안동 권씨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이주화 선생은 권씨 부인과 혼인하기 전에 두 부인과 사별하였고, 세 번째 권씨 부인을 맞았는데, 전처들과 사이에는 아들 넷을 두었습니다. 이내번 선생은 부친에겐 5남이고 모친에겐 장남이었습니다.
권씨 부인의 친정은 강릉이었습니다. 이율곡과 신사임당이 태어난 강릉의 오죽헌이 바로 부인의 친정댁이었습니다. 오죽헌은 원래 신사임당의 부친 신명화 선생이 소유했던 집인데 신명화 선생에겐 아들이 없었고 딸만 다섯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선생의 차녀였습니다. 선생이 별세하자 4녀의 남편인 권처균 선생이 오죽헌을 상속받았는데 권씨 부인은 권처균 선생의 후손입니다.
이내번 선생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습니다. 권씨 부인은 남편과 사별한 뒤 선생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강릉으로 이사했습니다. 오죽헌에서 십여리 떨어진 경포대 인근 마을에 정착해 살았습니다.
권씨 부인은 신사임당처럼 매우 지혜로운 여성이었습니다. 신사임당은 문학과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는데 권씨 부인은 이재와 경영능력이 탁월했습니다.
당시 권씨 부인이 시집가 살았던 충주는 교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각종 물산이 충주의 시장에서 거래되었습니다. 중요한 거래 물품 중에는 소금이 있었습니다. 마침 강릉 바닷가에는 염전들이 있었고 상당량의 소금을 생산했습니다.
남편의 유산 중 일부를 상속받아 강릉으로 이주한 권씨 부인은 아들과 함께 남대천 하류에 있던 염전을 구입하여 소금을 생산했습니다. 생산된 소금은 평창의 대화장에 가지고 가서 팔았습니다. 지금 대화는 시골의 작은 면소재지이지만 당시에는 우리나라 15대 시장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염전 경영은 크게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이 돈으로 또 농지를 구입했습니다. 염전 사업도 번창하고 많은 토지를 갖게 되자 넓은 터에 큰 집이 필요했습니다.
이내번 선생은 새 집을 지을 좋은 터를 구하려고 애쓰던 중에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생이 밖에 있는데 족제비 무리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경포호 호숫가를 따라 천천히 일렬로 떼지어 갔습니다. 선생은 족제비가 무리지어 다니는 모습을 처음 보았던지라 호기심도 생기고 이상한 예감이 들어 그들의 뒤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족제비들은 선생이 뒤따라 좇아갈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움직였습니다. 족제비 무리는 경포대에서 직선 거리로 1킬로미터쯤 떨어진 지금의 선교장터에서 숲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이내번 선생이 이곳의 지세를 둘러보니 아담한 야산에 둘러싸여 아늑하고 남향이라 양지바르며 터전이 매우 넓었습니다. 또 바로 앞에는 경포호가 있고 멀리 백두대간 연봉들이 눈에 들어와 풍광 또한 아주 수려했습니다. 집터로 매우 훌륭한 곳이었습니다.
선생은 하늘이 족제비 무리를 통해 특별한 명당을 점지해 주셨다 생각하며 이곳 땅을 구입하여 새 집을 짓고 여기로 이사했습니다.
선교장터는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와 동해바다를 향해 힘차게 뻗어온 산줄기가 여정을 다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생동하듯 부드럽게 솟아오른 산봉우리 아래에 있습니다.
이 터의 형국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배 형국으로 보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필자가 보기엔 기러기가 날개를 활짝 펴고 막 땅에 내려앉은 형국입니다.
지금 선교장 앞에는 작은 들판과 경포천, 그리고 물을 담아두는 저류지가 있는데 옛날에는 이곳들이 모두 경포호였다고 합니다. 그 때는 물가에 내려앉은 기러기 형국이었다고 보는 게 합당합니다.
선교장의 주산은 부드러운 물결과 같이 생긴 수성입니다. 온화하고 단아하면서도 생기가 넘칩니다. 단아한 수성의 정기를 받은 사람들은 지혜로우며 품성이 온화하면서도 의롭습니다.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하며 이웃과 화목하게 지냅니다.
기러기 형국 명당의 정기를 받은 사람들 또한 형제 간에 우애가 좋고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냅니다.
청룡과 백호는 높이와 길이가 균등하게 뻗어있습니다. 서로 가볍게 안아주는 형상으로 다정하게 보입니다. 이런 형상의 청룡과 백호도 사람들의 관계를 화목하고 평화롭게 만듭니다. 또, 앞에서 오는 기운을 잘 받아 안아 흩어지지 않게 갈무리해 줍니다.
이내번 선생이 처음 이주한 당시에는 청룡 백호가 끝나는 곳까지 경포호의 푸르고 맑은 물이 가득차 있었을 것입니다. 경포호에 서린 커다란 물산과 재화의 기운, 경제의 역량을 청룡 백호가 끌어안고 있는 형국이니 선교장터는 대부호가 나올 명당입니다.
선교장의 안산은 백두대간에서 경포호 남쪽으로 뻗어가는 산줄기에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입니다. 작고 예쁘게 생긴 둥근 봉우리들이 사이좋게 모여 있습니다. 높이 또한 너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적당합니다.
옛날에는 이 안산들이 경포호에 서린 재화의 기운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게 잘 보호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산의 모습이 아름다우면 좋은 사람들과 많이 교류하게 되고 그들의 성원을 받게 됩니다. 뒤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곘지만, 선교장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많은 덕을 베풀었고, 다른 이들 또한 선교장에 특별한 호의와 성원을 보내주었습니다.
가까운 안산들 뒤로는 멀리 백두대간 연봉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아스라히 아름답게 펼쳐진 풍경이 한폭의 수묵화 같습니다. 유장하고 장엄한 풍모가 수호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선교장터에서 바라다 보이는 사방의 산들은 모두 단아하고 수려하게 생겼습니다. 흉하거나 거칠게 생긴 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이 터에는 화를 불러오는 기운이 침범하기 어렵고 복을 불러오는 기운이 넘치게 됩니다. 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