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포스트] 삼성전자가 미국과 중국의 지정학적 갈등으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이면서 해법 마련이 시급해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지만 아직 ‘확실한 전략’이 보이지 않고 있다.
 
삼성전자 지정학적 위기에도 이재용 전략 안갯속, 컨트롤타워 필요성 대두

▲ 삼성전자가 지정학적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이재용 회장(사진)이 이를 해결할 구체적인 전략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이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 신사업 진출 등 중장기 사업전략을 효율적으로 추진하려면 그룹 내 컨트롤타워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17일 재계와 주요 외신에 따르면 반도체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이 격화되면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을 선도하던 삼성전자의 입지에도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우선 미국 상무부가 반도체법 주요 규제인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 세부 규정을 공개하면서 삼성전자가 미국에서 반도체보조금을 받는다면 중국 시안 공장은 사실상 5% 이상의 생산량 확대가 불가능해졌다. 

삼성전자는 현재 낸드플래시의 40%를 중국 시안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다.

대만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미국의 주요 IT 기업들이 지정학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 메모리반도체 업체에 생산시설을 중국 밖으로 이전하도록 요구하고 있다”며 “중국의 낸드플래시 생산 점유율은 2023년 31%에서 2025년 18%까지 떨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국 대신 미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도 효율적인 선택이 아닌 것으로 분석된다.

생산시설 건설 비용, 인건비, 허가 비용, 산업 안전 및 보건 규정 비용, 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노하우 학습비용까지 고려하면 한국이나 중국 등 아시아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 것으로 추산되기 때문이다. 반도체업계에서는 미국 공장의 제품 생산비용이 아시아보다 50% 이상 높을 것으로 보고 있다.

로이터는 “삼성전자의 텍사스주 테일러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건설 비용은 당초 예상됐던 170억 달러(약 22조 원)보다 80억 달러 정도 늘어난 250억 달러(약 33조 원)에 이를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게다가 미국 정부는 기업들이 초과 수익의 일부를 미국과 공유하고 기업 재정 여력, 현금 흐름, 고용계획 등 기업 내부정보까지 엑셀로 제출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미국은 반도체 관련 정책을 통해 글로벌 반도체 경쟁 구도의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데 삼성전자 등에는 수혜보다 리스크가 부각되고 있다”며 “최적의 대응전략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분석했다.

이재용 회장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피해를 최소화하고 삼성전자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이 회장은 3월 말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대표적인 측근인 천민얼 톈진시 서기와 면담을 하는 등 중국과 함께 성장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또 4월24일부터는 미국 경제사절단에 참여해 반도체법 가드레일(안전장치) 세부 조항과 관련해 미국 인사들과 논의를 진행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 지정학적 위기에도 이재용 전략 안갯속, 컨트롤타워 필요성 대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가운데)이 경계현 삼성전자 DS부문장 사장(오른쪽) 등과 함께 2023년 2월17일 삼성전자 천안캠퍼스를 찾아 패키지 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삼성전자>

하지만 이 회장이 지금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뚜렷한 글로벌 사업 전략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례로 삼성전자는 올해 초까지 반도체업황 악화에도 불구하고 ‘감산은 없다’는 방침을 유지했으나 최근 감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등 일관되지 못한 전략을 보여주기도 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삼성전자의 감산에 대해 “삼성전자는 인텔과 같은 자기만족을 경계해야 한다”며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감산 결정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에게 충격을 주었을 만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삼성전자가 오랫동안 메모리반도체 1위를 유지하면서 무사안일주의에 빠졌다는 비판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삼성전자가 확실한 방향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원인을 그룹 컨트롤타워 부재에서 찾는 분석도 제기된다.

지정학적 위기에 따른 대응방안, 대규모 투자와 인수합병, 신사업 진출 등 중장기적으로 사업전략을 세우려면 이 회장을 도와 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한데 지금의 삼성전자에는 그런 조직이 없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이 회장이 국정 농단 사전에 휘말리면서 2017년 2월28일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삼성 미래전략실을 해체했는데 지난해 말부터 삼성그룹 안팎에서는 컨트롤타워 부활 이야기가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다. 

지난해 12월 약 6년 만에 열린 삼성그룹 전체 사장단 회의에서도 컨트롤타워와 관련된 논의가 진행됐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여전히 컨트롤타워에 부정적인 여론도 있는 만큼 현재는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단계인 것으로 파악된다.

만약 삼성이 컨트롤타워를 부활시킨다면 법적인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찬희 삼성 준법감시위원장은 지난해 말 “컨트롤타워가 준법 위반의 여지는 적다고 본다”는 생각을 밝히며 삼성의 컨트롤타워 부활 가능성에 힘을 실어줬다.

삼성 준법감시위 관계자는 “현재 삼성 준법위에서 컨트롤타워 재건과 관련해 논의되고 있는 것은 없다”며 “이 위원장의 발언은 개인적인 의견 차원으로 봐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