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삼성 창업 이병철 "더 높은 파도 위에 올라타라"

▲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의 생가(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 입구. 부자 기운을 받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다. <이재우>

[비즈니스포스트] "서구인들은 삼성의 반도체 진출 선언을 정신이상자의 발언으로 간주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스펜스(Michael Spence)는 2012년 펴낸 '넥스트 컨버전스(The Next Convergence)'라는 책에서 삼성이 반도체 사업에 뛰어들던 1983년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어원문까지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삼성이 반도체칩을 개발하고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해 서구의 관측자들을 놀라게 했다. 서구인들은 삼성의 반도체 진출 선언을 정신이상자의 발언으로 간주했다."(Samsung astonished Western observers by announcing its intention to develope and make semiconductor memory chips. This was viewed as lunacy in the West.)

당시 관련 기술이 전혀 없던 삼성이 미국, 일본 등 선진기업들의 비웃음거리가 됐던 게 사실이다. 심지어 인텔은 "이병철 회장은 과대망상증 환자(Chairman Lee is a megalomaniac)"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삼성 창업자인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이 반도체 사업 투자를 전격 선언한 건 1983년 2월8일이다. 이른바 '2·8 도쿄 선언'. 틈날 때마다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기업들을 꾸준히 벤치마킹하고 관찰하던 이병철은 도쿄라는 창(窓)을 통해 세계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다. 

사실 이병철은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는 주위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피디하고 과감하게 사업을 진행했다. 곧바로 64KD램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의구심이 환호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시 삼성반도체통신은 불과 6개월 만에 64KD램 생산에 성공했다. 

돌이켜 보면 삼성의 반도체 시장 진입은 불가능에 가까운 벽이었다. 하지만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했듯 호암의 판단은 삼성의 '퀀텀 리프(Quantum Leap: 비약적 도약)'를 이끌어내는 다리가 되었다. 그런 호암은 삼성의 '1메가 D램 개발'(1986년)을 지켜본 후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이건희 시대를 거쳐 이재용 체제인 2022년 현재 삼성전자는 그동안 세계 반도체 시장을 지배해온, 거기다 자신들을 비웃었던 인텔을 제치고 매출 규모 1위 자리에 올라섰다. 비유하자면 새우가 고래를 삼킨 격이다. 1983년을 '삼성 반도체 원년'으로 본다면 올해는 햇수로 64KD램 개발 40년이 되는 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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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은 호암(湖巖)이라는 아호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해 '호암자전'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1955년 11월 무렵, 전 상공회의소 회장 우계(牛溪) 전용순씨의 권유로 아호 호암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호암은 생전에 인재와 사람에 대한 어록을 많이 남겼다. <호암자전>

그랬다. 반도체는 이병철의 '위대한 유산'이다. 그런 이병철의 또 다른 유산은 경영어록들이다. 특히 자서전 '호암자전'에선 그가 평소 강조했던 어록들을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다. 필자는 오히려 호암이 과거 서울경제신문에 기고했던 칼럼에 주목한다. 
  
이병철은 이 신문에 '재계회고'란 제목으로 1976년 4월7일부터 6월25일까지 장장 54회에 걸쳐 칼럼을 연재했다. 훗날 호암자전의 기초가 된 이 칼럼에서 호암은 자신의 경영철학을 분명하고 충실히 밝히고 있다. 

필자는 해당 신문사에 요청해 칼럼을 모두 찾아 읽어 보았다. 호암의 글은 결코 철 지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여전히 기업인(경영자) 또는 비즈니스맨들의 정신을 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했다. 호암의 가장 강한 주장이 드러난 곳은 칼럼 최종회다. 그는 '무능한 경영자는 범죄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기업인으로 경영을 잘못하여 부실기업을 만드는 것은 곧 범죄나 다름없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부실기업을 만들어 은행 등 거래선이나 사회에 피해를 주고 종업원이 일자리를 잃게 하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용서받을 수 없는 사회적 죄악인 것이다.(서울경제신문 1976년 6월25일자 '재계회고' 중에서)

호암은 이 말을 통해 기업(인)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영화이긴 하지만 유사한 기업 사례를 하나 들자. 무인도 표류를 다룬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대사다. 미국 운송업체 페덱스(Fedex)에서 중간간부로 일하는 척 놀랜드(톰 행크스 역)는 작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고객과의 시간 약속을 어기는 건 죄악이에요." 

톰 행크스의 대사엔 시간을 절대적 가치로 여기는 페덱스의 존재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이병철의 어록("무능한 경영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과 일맥상통하지 않는가.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삼성 창업 이병철 "더 높은 파도 위에 올라타라"

▲ 사랑채와 안채로 구성된 호암 생가. 생가 뒤로는 울창한 대숲이 조성되어 있다. <이재우>

글의 분위기를 바꿔본다. 필자는 올해 8월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 있는 호암 생가를 찾았다. '이병철길'로 이름 지어진 좁은 마을길을 따라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니 정갈한 옛날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솟을대문 너머로 넓은 마당이 있고 안채와 사랑채가 자리했다. 호암의 조부인 유학자 문산(文山) 이홍석 선생이 지은 집으로, 호암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호암 생가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한다. 

필자가 정작 보고 싶었던 공간은 호암의 조부가 세운 문산정(文山亭)이라는 서당이다. 생가에서 1km 가량 떨어진 산속에 있는 이 서당은 조부의 호 문산을 따서 지었다.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로 좁은 오솔길. 흙담을 둘러싼 팔작 구조의 아담한 서당이 산속에 들어 앉아 있었다. 호암은 어린 시절 형(이병각)과 함께 산을 넘어 이 서당에 다녔다고 한다. 

호암은 서당에서 조부로부터 논어 등 한학을 배웠는데 훗날 논어는 삼성경영의 밑바탕이 되었다. 호암은 '호암자전'에서 일생을 통해 가장 감명 깊은 책으로 논어를 꼽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는 인간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바로 논어다. 나는 생각이나 생활이 논어의 세계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해도 오히려 만족한다."

그런 논어는 이건희와 이재용으로 이어지는 삼성일가와 경영진의 필독서였으며 지금은 없어진 미래전략실에서도 읽고 토론하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삼성 내에서 논어는 '경영 교과서'나 다름없었다. 

중국 경영학자 사오위(邵雨: 관리통제력 이론의 창시자) 박사는 이런 논어를 현대 기업경영에 접목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기업인은 당장 논어를 펼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권하건대, 논어에서 경영의 지혜와 혜안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다시 호암의 칼럼 이야기로 돌아간다. 호암은 인재들에게 도전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보보시도량(步步是道場)'이란 말을 즐겨했다. 호암은 이 말을 이렇게 풀이했다. 

"사람은 늙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닦고 스스로를 닦아 나가기를 멎을 때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재계회고' 6월1일자) 달리 말하면 도전을 멈춘 사람이나 기업은 곧 퇴보하고 이내 퇴출된다는 의미이다. 

'수장선고(水長船高)'라는 말에서는 호암의 과감성을 읽을 수 있다. "물이 늘고 파도가 거칠어지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 대신 배는 그만큼 높이 올라 앉는다."('재계회고' 6월11일자)

삼성이라는 배의 조타를 잡았던 '선장 호암'. 그는 후배 기업인들에게 두려움 없이 더 높은 파도 위에 올라타라고 매섭게 조언하고 있다. 설령 바다 속으로 고꾸라져 짠물(실패)을 마시더라도 말이다. 

호암의 이런 어록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비즈니스 성공코치이자 투자컨소시엄 거스리그룹(The Guthrie Group) 회장인 댄 페냐(Daniel. S. Pena·77)의 말을 덧붙이면 기업인들이 가야 할 길은 분명해진다. 

"고요한 바다에서 사업을 하겠다는 말은 항구에 머물겠다는 뜻이다." 

더 높은 파도 위에 올라탈 것인가(호암), 더 넓은 바다로 나갈 것인가(댄 페냐)에 따라 기업의 운명이 좌우되는 것이다. 
 
[경영어록의 연금술사들] 삼성 창업 이병철 "더 높은 파도 위에 올라타라"

▲ 이병철의 조부 문산(文山) 이홍석 선생이 세운 서당 문산정(文山亭). 호암은 다섯 살 때부터 이 서당에 다니며 논어 등 한학을 배웠다. <이재우>

끝으로 사족 하나. 호암의 골프 열정이다. 그가 소문난 골프광에다 연습광이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필드는 호암에겐 사업 아이디어의 원천이자 결단의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 호암에게 1981년 11월22일은 생애 가장 흥분된 날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의 두 번(가스미카세키CC와 호도가야CC) 홀인원에 이어 이날 안양CC에서 세 번째 홀인원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골퍼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호암의 나이 71세였으니. 

암 투병 중이던 호암이 생애 마지막 라운딩을 한 건 1987년 10월20일이었다. 당시 안양CC에 근무하던 이강선 프로골퍼가 동행했다. 호암이 이날 보여준 근성은 골퍼들 사이에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세 번째 홀에 다다르자 주위가 많이 어두워졌다. 사람들은 이병철이 조금이라도 더 골프를 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골프카트 네 대, 오토바이 세 대, 차에 달려 있는 헤드라이트를 모두 밝혀 그들이 걸어가는 필드를 비췄다."(이채윤 저, '삼성가 사람들 이야기', 성안북스)

호암은 라운딩 20일 뒤인 11월 19일 타계했다. 이재우 재팬올 발행인
 
이재우 발행인(일본 경제전문 미디어 재팬올)은 일본 경제와 기업인들 스토리를 오랫동안 탐구해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열성팬으로 '원령공주의 섬' 야쿠시마 사진전을 열기도 했다. 부캐로 산과 역사에 대한 글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