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오른쪽)이 2022년 8월19일 기흥반도체 R&D(연구개발) 단지 기공식에 참석해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삼성전자> |
[비즈니스포스트] 삼성의 역사에서 세탁기만큼 존재감이 큰 제품은 많지 않다.
세탁기라고? 맞다. '삼성이 하면 다르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준 고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을 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삼성이 생산한 불량 세탁기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지 30년 되는 해다. 그런데 삼성에 또 다시 세탁기에 문제가 생겼다.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전자의 세탁기 문제가 삼성이 놓인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삼성전자가 최근 일부 드럼세탁기 제품의 유리문이 파손되는 일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삼성전자가 그동안 강조해 왔던 ‘품질경영’이 흔들리고 있다.
더구나 스마트폰,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등에서도 품질과 관련한 잡음이 발생하면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적극적으로 내부를 재정비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22일 전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연이은 유리문 파손 사고로 논란을 일으켰던 드럼세탁기 제품의 무상 수리를 이날부터 시작했지만 소비자들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전자는 이미 7월부터 일부 소비자들의 신고를 통해 일부 드럼세탁기 유리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체 분석을 통해 문 뚜껑과 외부 유리 접착 면에 있는 잔류 이물질 등으로 외부 유리가 떨어져 나갈 가능성을 확인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사고를 파악한지 한 달 동안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한국소비자원과 국가기술표준원이 사고 관련 자료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한 뒤에야 무상 수리 결정을 내렸다.
문제가 된 세탁기를 구매했다는 한 소비자는 온라인카페에 “한 달 전부터 세탁기에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제품을 사용할 때마다 불안했다”며 “삼성전자가 소비자원이 나서기 전에 해결책을 내놓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세탁기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반도체 등에서도 ‘품질경영’의 명성에 흠집이 생기는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스마트폰 GOS(게이밍옵티마이징서비스) 논란으로 곤욕을 치렀다. GOS란 갤럭시 시리즈 스마트폰과 태블릿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애플리케이션인데 GOS가 활성화되면 갤럭시S22 등 최신폰의 성능이 반 토막이 났던 것이다.
삼성전자는 GOS를 강제적으로 적용하던 것을 해제하고
한종희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직접 주주총회에서 사과하는 등 대응에 나섰지만 삼성전자 스마트폰의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입었다. 삼성전자가 8월11일 갤럭시Z폴드4를 공개하는 행사에서도 GOS에 대한 질문이 다시 나왔을 정도다.
또 올해 초에는 삼성전자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수율이 문제가 됐다.
삼성전자의 첨단공정인 4나노 파운드리의 수율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면서 고객사인 퀄컴에게 약속한 수준의 제품을 제때 공급하지 못했던 것인데 결국 퀄컴은 다음 세대 제품을 삼성전자가 아닌 대만 TSMC에 맡겼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는 수율 개선 등을 위해 첫 내부감사(경영진단)를 진행했다.
이 부회장의 선친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품질경영을 항상 강조해왔는데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한지도 벌써 30년이 되가고 있다.
이 회장은 1993년 6월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 임직원 200여 명을 모아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며 신경영을 선언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이 회장을 대표하는 말로 회자된다.
▲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회의에서 임원과 해외 주재원 등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이 회장이 '신경영 선언'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은 당시 이 회장이 삼성전자 직원들이 세탁기를 조립하다 뚜껑 여닫이 부분이 맞지 않자 즉석에서 칼로 깎아 조립하는 영상이 담긴 비디오를 본 것에서 시작됐다.
이 회장은 비디오를 본 뒤 “회사가 썩었다. 완전히 썩었다”고 분노하며 급히 삼성그룹 사장단과 임원들을 출장지였던 프랑크푸르트에 소집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삼성전자는 대대적으로 제품 품질을 개선하며 개혁을 진행했고 현재 삼성전자가 글로벌 1등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1994년에는 휴대폰 ‘애니콜’의 품질이 경쟁사에 비해 뒤처지자 이듬해 500억 원어치의 제품을 직접 소각하는 ‘화형식’까지 시행하며 품질경영을 위해 거액의 손실을 감수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이때의 결단으로 삼성전자는 휴대폰 품질을 끌어올렸고 현재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1위를 차지하게 됐다.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이 그룹의 총수가 된 뒤에는 삼성전자의 품질경영을 앞세운 ‘초격차’ 전략이 다양한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에 놓여 있다.
이는 이 부회장이 사법리스크 탓에 ‘총수 리더십’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 때문에 광복절특사로 이 부회장의 경영족쇄가 어느 정도 풀린 것을 계기로 이 부회장이 꿈꾸는 ‘뉴삼성’이 본격적으로 실현될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이 부회장은 19일 사면 뒤 첫 행보로 삼성전자 기흥캠퍼스 반도체 연구개발(R&D) 단지 기공식에 참석했다. 기흥캠퍼스는 40년 전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반도체사업을 시작한 지역으로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1등 신화를 이룬 상징적인 곳이다.
이날 기공식에는
이병철 창업주가 1983년 반도체 사업진출 계획을 발표한 ‘도쿄 선언’의 일부 글귀가 공개됐는데 이는 이 부회장이 삼성그룹의 ‘초심’을 되새기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 부회장은 “40년 전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해 첫 삽을 뜬 기흥 사업장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나병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