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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옥시 본사 앞에서 옥시 영국 본사 레킷벤키저를 항의 방문했던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
기자가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태어날 때부터 함께 살았던 친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는데 할머니는 살아생전 유달리 둘째 손자(기자)를 이뻐하셨다. 어린 시절 기자도 어머니보다 할머니를 따라 다닌 일이 더 많았다.
당시 서울에서 하숙생활을 하던 기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갈을 제때 받지 못해 임종을 지키지도 못했다(당시엔 휴대폰이 없어 시골 유학생이 하숙집에 붙어 있지 않으면 전화 연락이 쉽지 않았다).
죄스러운 마음에 부랴부랴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갔다.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계신 할머니를 보는 순간 그렇게 눈물이 났다. 이제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상실감과 허망함이 그렇게 큰 것인지 그때 비로소 처음 알았다.
고백하건대 기자는 오십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오면서 그때 이전이나 그때 이후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다.
기자는 가족 중 유일하게 할머니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지만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피해자들이 겪고 있을 아픔과 눈물의 깊이를 감히 짐작하지 못한다.
죽음이라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의 할머니는 여든을 넘기고 천수를 다 누리신 채 자연스런 죽음(호상)을 맞았지만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 가족들은 너무나 어처구니없게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겪어야 했다.
더 쾌적하고 좋은 환경을 아이(혹은 아내)에게 제공해 주기 위해 안방에 틀어 놓은 가습기로 말미암아 죽음을 맞게 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은 2011년 첫 사망자가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는데 5년이 지난 이제서야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지고 있다.
이번 사건은 ‘안방의 세월호 참사’로 불린다. 지금까지 확인된 공식 사망자만 239명에 이른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원인도 모른 채 목숨을 잃었거나 건강을 해쳤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제대로 된 정부라면 사건 발생 후 5년이나 허송세월을 보낸 데 대해 사과하고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해 관련 책임자를 엄중 처벌해야 한다. 두 번 다시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 제도와 법규를 시급히 정비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지금껏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책임 회피가 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옥시라는 개별 기업이 저지른 잘못과 소비자들 사이의 문제인 만큼 정부는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1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출석해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사과하라”는 의원들의 요구에 “입법 미비의 책임은 통감한다”면서도 끝내 죄송하다는 말은 입밖에 내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만나봤는냐”는 질문에도 “왜 제가 만나야 하느냐, 의사도 아닌데...”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개별 기업과 개인 사이의 문제인 만큼 정부가 사과할 일은 아니라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셈이다. 윤 장관의 태도는 이번 사건을 대하는 정부의 무능하고 안이한 대처 행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정부 책임론이 불거져 나오자 권성동 새누리당 전략기획본장은 1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섣불리 정부 책임론을 제기하며 정치 공세를 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정부 책임론 진화에 나섰다.
그는 “길거리 다니다가 칼 맞으면 국가가 배상하나”라며 이번 사태에 정부는 책임이 없다는 뜻을 에둘러 내비쳤다.
정부의 책임지는 모습과 사과를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요구를 한낱 ‘정치공세’로 돌려세운 것이다.
정부의 무사안일하고 책임회피적인 모습은 2014년 세월호 참사때와 지난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국민들이 원인도 제대로 모른 채 억울한 죽음을 맞았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다.
국민들은 이러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을 거치면서 일종의 ‘교훈’을 얻게 됐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은 스스로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국가의 중요한 역할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지 못하는 정부라면 그 정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를 믿지 못하는 사회, 자신의 생명과 재산은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사회는 분명 바람직한 사회가 아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가 아님도 물론이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부가 먼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피해자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그리고 지난 5년간 헤아리기 어려운 고통의 세월을 견뎌온 피해자 가족들의 눈물을 이제는 닦아주어야 한다. [비즈니스포스트 김재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