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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가 자동차시장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SUV가 세단의 장점을 그대로 흡수하면서 자동차회사의 희비를 가르고 있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는 SUV 돌풍에서 한발 물러나 있다. SUV시장이 커지는 데 따른 수혜를 고스란히 다른 자동차회사에 빼앗기고 있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SUV시장 공략에 뒤늦게 나섰다.
현대차는 그동안 기존 SUV를 앞세워 SUV시장을 지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경쟁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현대차도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 소형 SUV부터 고급 대형 SUV까지 시장에 가득 들어찬 상황이다.
현대차는 왜 SUV시장에서 뒤쳐졌을까? 현대차는 뒤늦게라도 SUV 열풍에 합류할 수 있을까?
◆ 내수시장에서 기아차와 격차 줄어
현대차가 내수시장에서 기아차에 역전당할 기미가 보이고 있다.
현대차는 올해 들어 7월까지 내수시장에서 39만6천여 대의 차를 판매했다. 기아차는 같은 기간 내수시장에서 29만여 대의 차량을 팔았다.
현대차의 내수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5% 감소했지만 기아차의 판매량은 11.4%나 증가했다.
두 회사의 희비를 가른 건 SUV를 포함한 RV(레저용 차량)다.
기아차는 현대차에 비해 다양한 RV 라인업을 갖추고 있다. 기아차는 현대차가 판매하고 있지 않은 미니밴도 2종이나 판매하고 있다.
기아차가 미니밴 카니발을 한 달에 6천~7천 대 파는 동안 현대차는 구경만 하고 있는 셈이다.
현대차가 최근 해외시장에서 부진한 실적을 내는 이유로 SUV 라인업 부족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많다.
세계적으로 SUV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지만 현대차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가장 큰 시장인 미국과 중국 자동차시장에서 SUV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SUV(픽업트럭과 밴 포함) 판매대수는 875만 대로 2013년보다 10% 이상 늘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경기가 침체되면서 자동차시장의 성장세가 꺾이고 있지만 SUV만큼은 여전히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 세단 판매량은 5.9% 줄어든 반면 SUV 판매량은 45.9% 급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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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진 현대자동차 부사장이 지난 3월17일 '올 뉴 투싼' 신차발표회에 참석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시스> |
◆ 현대차, 투싼과 싼타페 단 2종으로 글로벌시장 공략
현대차는 내수시장에서 투싼과 싼타페, 맥스크루즈 등 모두 3종의 SUV를 판매하고 있다. 현대차의 대형 SUV 베라크루즈는 오는 9월 단종된다.
그마나 올해 3월 완전변경 모델이 출시된 투싼과 7월 부분변경 모델이 출시된 싼타페를 제외한 맥스크루즈는 판매량이 매우 저조하다. 맥스크루즈는 올해 들어 7월까지 4400여 대밖에 판매되지 않았다.
글로벌시장의 경우 상황이 더욱 열악하다.
현대차가 글로벌시장에서 판매하고 있는 SUV는 투싼과 싼타페밖에 없다.
맥스크루즈가 싼타페의 롱바디 모델로 사실상 싼타페와 같은 차량이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맥스크루즈를 그랜드 싼타페라는 이름으로 수출하고 있다.
현대차는 이밖에 중국과 인도에서 ix25와 크레타 등 현지전략 SUV도 판매하고 있지만 특정국가에서만 팔고 있어 판매량이 그리 많지 않다.
◆ 글로벌시장에서 뒤늦게 대응 시작
정몽구 회장은 최근 SUV시장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현대차는 신형 투싼을 오는 9월 중국에 조기투입하기로 했다. 현대차는 또 중장기적으로 중국4공장과 5공장이 완공되는 시점에 맞춰 가격 경쟁력을 강화한 소형 SUV 등 중국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현지 전략차종을 다양하게 선보인다는 계획도 세워뒀다.
현대차가 이른 시일 안에 미국에서 벨로스터 기반의 소형 SUV를 출시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현대차가 그동안 미국에서 투싼을 통해 소형 SUV시장을 공략했지만 예상보다 SUV시장이 커지면서 차종을 세분화하는 쪽으로 전략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차는 뒤늦게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중국과 미국에서도 SUV시장이 확대될 것이란 전망이 꾸준히 나왔지만 현대차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현대차가 주저하는 사이 다른 자동차회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SUV시장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빅3로 불리는 GM과 포드, 피아트크라이슬러는 SUV와 픽업트럭의 수요증가에 힘입어 높은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미국 자동차시장이 회복될 조짐이 보이자 재빠르게 미국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SUV와 픽업트럭 등을 시장에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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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충호 현대자동차 사장이 2012년 4월19일 신형 '싼타페' 신차발표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뉴시스> |
◆ 내수시장 선점 못한 채 뒤쳐져
현대차는 내수시장에서도 다른 자동차회사들에게 SUV시장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르노삼성자동차는 2013년 말 소형 SUV QM3를 들여와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2014년 소형 SUV QM3와 트랙스는 둘이 합쳐 3만 대 가까이 팔렸다. 같은 기간 현대차의 맥스크루즈와 베라크루스는 둘이 합쳐 1만3천여 대 판매되는 데 그쳤다.
올해 초 쌍용차의 티볼리도 소형 SUV시장에 합류했다. 쌍용차는 마힌드라그룹에 인수된 뒤 회사의 운명을 가를 4년 만의 신차로 소형 SUV를 선택했다.
소형 SUV의 인기는 2년째 식지 않고 있다. 올해 들어 7월까지 QM3, 트랙스, 티볼리를 합쳐 내수시장에서만 4만1천여 대 팔렸다.
현대차도 뒤늦게 소형 SUV시장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원래 꾸준한 판매량을 유지하던 투싼의 완전변경 모델을 내놓으며 1.6리터 엔진을 추가로 탑재했을 뿐 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QM3와 트랙스, 티볼리와 투싼 1.6리터 모델은 배기량은 비슷하지만 차체 크기에서 차이가 크다. QM3와 트랙스, 티볼리의 전장이 4125~4245mm인 반면 투싼의 전장은 4474mm로 최대 350mm 가까이 차이난다.
소비자가 차를 선택하는 데 차의 크기도 많은 영향을 미친다. 다른 자동차회사들이 여성 운전자의 증가와 주차공간 등을 고려해 소형 SUV를 내놓았지만 현대차가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다.
국내 자동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셈이다.
◆ 현대차의 세단 고집
현대차는 SUV를 선호하는 소비자들의 기호를 발 빠르게 파악하지 못하고 세단만 고집했다.
현대차가 지금의 현대차를 만든 세단의 성공에 취해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의 현대차를 만든 건 엑셀과 아반떼, 쏘나타와 그랜저로 이어지는 세단 라인업이다.
현대차는 이 세단 라인업 덕분에 2000년 이후 글로벌시장에서 인정받고 글로벌 판매 5위도 달성했다.
안젤라 홍 노무라증권 연구원은 “2000년대 초 미국에서 첫 공장 문을 연 이래 현대차는 세단 개발과 개선에만 집중해 왔다”며 “지금까진 소비자들이 세단을 선호해 온 게 사실이며 이는 현대차가 SUV시장을 등한시하게 된 요인이었다”고 분석했다.
◆ 검증된 모델에만 의존
현대차가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시장에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차가 그랜저나 쏘나타, 투싼과 싼타페 등 시장에서 상품성이 검증된 차종의 후속모델만 내놓는 등 지나치게 몸을 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회사에게 신차 출시는 양날의 검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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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차가 2013년 출시한 싼타페의 롱바디 모델 '맥스크루즈'. |
신차에 자동차회사의 미래가 걸려 있다. 신차를 개발하는 데 최소 2~3년의 시간이 걸리는 데다 비용도 수천억 원이 든다. 하지만 기껏 내놓은 신차가 실패할 경우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 데다 재고처리나 주가하락 등 후폭풍도 크다.
현대차가 미국시장에서 픽업트럭을 내놔야 한다는 요구가 많은 상황에서도 아직 시장출시를 결정하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현대차가 판매 중인 투싼은 2004년, 싼타페는 2000년 처음 출시됐다. 현대차의 SUV를 책임지는 투싼과 싼타페가 모두 나온 지 10년이 훌쩍 넘은 모델이다. 베라크루즈는 2007년 출시됐지만 한 번도 완전변경 모델이 출시되지 않았다.
현대차는 10년 가까이 새로운 SUV를 시장에 내놓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최근 롤스로이스가 창립 110년 만에 SUV 출시를 결정하고, 포르쉐도 브랜드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에도 고급차 브랜드 가운데 최초로 SUV를 출시하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인 점과 대조적이다.
현대차는 베라크루즈를 단종하면서 대형 SUV시장에 대한 대응방안도 아직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현대차의 대형 SUV 라인업에 공백이 생기는 셈이다.
현대차는 베라크루즈의 후속모델이 나올 때까지 기아차 모하비에 고급 대형 SUV 수요를 고스란히 빼앗길 처지에 처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조은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