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 A씨는 실무를 가르쳐 준다는 제안에 한 일러스트 교육학원에 등록했다. 그녀는 게임회사의 외주 작업에 동원되어 6개월간 주 6일, 하루 12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따로 교육은 없었다. 6개월 치의 노동에 대한 급여로 총 96만 7천원을 받았지만, 교육비 명목으로 이 중 30만원을 반납해야 했다. A씨가 일한 시간으로 이 금액을 나누면 그녀의 시급은 대략 344원이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또 다른 일러스트레이터 L씨는 중개업체를 통해 외주 업무를 수주했다. 고용계약서를 요구했지만 업체 측은 매번 거절했다. L씨는 업무를 마치고 중개업체를 통해 25만원을 지급받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외주 대금은 50만원이었다. 25만원은 중개업체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물론 중개 수수료에 대한 합의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A씨와 L씨가 일했던 곳은 팝픽, 일러스트레이터의 권익 향상을 위해 백방으로 애쓴다는 기치를 내건 국내 일러스트 업계의 대표 업체였다.

  12시간 일하고 시급 344원, '창조산업'의 그림자  
▲ 국내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 업계의 대표적 업체였던 팝픽. 최저임금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에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착취해왔던 사실이 밝혀져 기소당한 상태이다.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은 새롭게 성장하는 분야이다.  주요 수요는 게임 업계에서 발생한다. 시장 자체가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들과 게임 회사가 서로의 용역과 재화를 거래할 수 있는 환경이 아직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이를 이용해 비단 팝픽뿐만이 아니라 온갖 중개 업체 및 일러스트 교육학원들이 터무니없는 수수료를 떼어가거나 아예 외주 대금을 지급하지 않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다수의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 교육만을 받았기에 외주 대금 지급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도 대처 방법을 몰라 묻고 넘어가며, 실질적인 대처를 하려 해도 기본적으로 프리랜서인 탓에 노동법의 보호를 받기 어렵다.


한국 게임업계의 잠재력은 매우 강력하다. 매년 수십억 이상의 개발비를 들인 대작 게임이 등장한다. 한 달에도 수십 개씩의 모바일 게임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많은 국내 게임 회사가 해외에도 서비스를 실시하며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용자들은 게임 내의 아이템을 구매하거나 월정액 이용권을 구입하기 위해 선뜻 지갑을 연다. 그러나 그들이 지불하는 금액 중 게임 플레이 경험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그래픽 부분으로 흘러가는 비율은 지극히 낮다. 상위 1퍼센트의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고서야 생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은 많다. 그렇기에 지금으로서는 굳이 몸값을 올려주는 대신, 그 돈에도 일하겠다는 다른 사람과 계약하는 방법이 통한다. 그러나 시급 344원이 통용되는 시장에 앞으로도 인력이 넘쳐날 수는 없다. 실제로 일러스트레이터 지망생들이 생계 문제로 그림의 꿈을 접고 다른 분야에서 취업을 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업계에 남아 있는 일러스트레이터들 중 다수도 그림에 대한 애정 때문에 계속 그리고 있을 뿐, 외주만으로 먹고 살기가 힘들다는 고민을 안고 있다. 디지털 일러스트레이션 시장이 피어나기도 전에 고갈되지 않으려면 그림 작가를 소모품처럼 다루는 지금의 행태가 개선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