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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11월 '제네시스' 신차 발표회 참석한 정몽구 회장(오른쪽에서 세번째)과 정홍원 총리(오른쪽에서 네번째) |
"물건 중의 왕, 첨단의 사물."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자동차를 이렇게 정의했다.
자동차는 단순히 이동수단에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는 이제 개성을 드러낸다. 그런데 현대차는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선택의 폭 자체가 너무 적다. 이것이 현대차의 대표적 약점으로 꼽힌다. 현대차 하면 그 무엇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같은 맥락이다.
정의선 부회장이 ‘모던 프리미엄’ 전략을 들고 나왔지만 아직도 실체는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 부회장은 2011년 1월 미국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고객 만족을 위해서 고객이 기대하는 이상의 감성적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현대차의 약점이 최근 다시 한번 지적됐다. 라인업 부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된 것이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의 크리스 박 부대표 겸 시니어 애널리스트는 지난달 26일 한 세미나에서 “현대차의 전반적 재무구조는 우수하고 영업으로 창출되는 현금흐름도 글로벌 자동차중에서 가장 좋은 편”이라면서도 그에 걸맞는 매출 규모가 작다고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그 이유로 현대차의 경우 고객이 선택할 수 있는 라인업 자체가 적다는 점을 꼽았다. 현대차와 기아차를 모두 합쳐서 모델 수는 40여 개 불과하다. 반면 폭스바겐은 150여 개, 닛산은 110여 개에 이른다.
현대차가 국내에서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지만 안티 현대차 분위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도 이런 라인업 부족이 한 원인을 차지한다. 선택할 수 있는 차가 제한적이다 보니 고객의 입장에서 똑같은 차를 고를 수밖에 없고 그만큼 불만도 높아지고 그 불만도 집중된다.
현대차도 라인업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대차는 다음달 29일 열리는 부산 국제모터쇼에서 개발하고 있는 준대형 신차를 공개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현대차는 신형 제네시스와 신형 쏘나타를 내놓았지만 새로운 라인업은 아니었다.
이번 신차는 제네시스와 그랜저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에서 수입 세단의 공세를 막기 위한 현대차의 야심작이다. 그랜저보다 크되 제네시스의 고급을 얹혀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제네시스 이상의 대형 세단은 부담스러워하는 계층을 공략하기 위한 모델이다. 가격도 그랜저와 제네시스의 중간인 3천만 원 중반에서 4천만 원 중반이 유력하다.
국내에서 이 모델에 대한 성공 가능성을 놓고 전망은 엇갈린다. 현대차가 라인업이 부족한 만큼 일단 다양한 라인업을 갖추는 것은 바람직하다. 쏘나타 그랜저 제네시스로 이어지는 라인업이 단조롭기 때문에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이 차가 그랜저의 수요를 잠식해 아랫돌 빼 윗돌 막는 식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 전망도 나온다.
한 자동차 전문가는 “지난 1996년 현대차가 쏘나타와 그랜저의 중간인 마르샤를 내놓았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며 “현대차가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차를 내놓지 않는다면 과거의 아픔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라인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실패를 맛본 적이 있다.
2011년부터 출범한 'PYL'는 지난해 현대차 내수 부진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PYL는 프리미엄(Premium), 유니크(YouUnique), 라이프스타일(Lifestyle)의 약자로 20~30대의 개성있는 고객을 대상으로 현대차가 특화한 브랜드다. 이들 차종으로 벨로스터, i30, i40 등이 있다. 현대차는 이들 차종에 수백억 원에 이르는 마케팅 비용을 투입했으나 지난해 벨로스터는 2012년 대비 41.2%, i30는 32.4%, i40는 43.7%씩 판매량이 떨어졌다.
현대차는 다양한 고객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 만든 파생모델이라 판매량이 적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현대차는 PYL가 국내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늘렸다고 평가한다. 전체 시장 규모가 작아 자동차시장 점유율이 낮을 뿐 충분히 선방했다는 주장이다.
벨로스터는 해치백 수입차량이 크게 늘어나자 현대차가 내놓은 야심작이었다. 게다가 현대차의 새 블랜드 슬로건인 '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 철학이 반영된 첫번째 자동차이기도 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에게 호평받지 못했다. 미국의 자동차전문지 모터트렌드는 “핸들링이나 가속력이 스포티한 디자인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영국 BBC ‘탑기어’의 진행자 제레미 클락슨은 "이 차는 내가 몰아본 차 중에서 가장 지루하다"고 혹평했다.
PYL 차량은 현대차 내부에서 큰 고민거리다. 현대차 승용차 가운데 판매량 꼴찌 3인방이기도 하다. PYL 차종 개발에 투입한 돈만 7천억 원이나 되는데 돈만 쓰고 팔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라인업에 대한 현대차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새로운 차를 하나 개발하는 데 수천억이 들어간다. 안전한 길은 잘 팔리는 차의 새모델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신형 쏘나타, 신형 그랜저, 신형 제니시스 등이 그런 경우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라인업 확대는 되지 않는다. 적은 라인업으로는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5위에서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현대차가 5월에 새로운 라인업의 차를 내놓는다면 그 차의 성공은 현대차에 자신감을 줄 수도 있고 실패의 경험을 되풀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자신감을 준다면 라인업 확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지만 실패의 경험만 남는다면 라인업 확대의 숙제는 더 해결이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