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로 금융회사들은 금융당국이 '모범'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자율'을 강제로 붙인 규제를 만들고 문제가 터지면 규준의 잣대를 수시로 바꾸는 일을 반복해 "차라리 강력하고 정확한 법률이 있는 것이 낫다"며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은 금융연구원, 은행권과 함께 ‘대출금리 제도개선 TF(태스크포스팀)’을 꾸려 은행권의 대출금리 모범규준 개선안을 논의하고 있다.
KEB하나은행과 한국씨티은행, BNK경남은행 등에서 대출금리를 과다하게 부당산출한 정황이 적발된 만큼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은행 내부 시스템 개선을 위한 대출금리 모범규준 개선과 금융소비자를 대상으로 한 정보 제공 의무 강화 등을 뼈대로 한 모범규준 개선안을 하반기에 내놓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모범규준은 금융회사들의 자율적 합의를 바탕으로 기준을 이끌어낸 것이기 때문에 이를 어기더라도 제재할 법적 근거가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6월에 마련된 은행권의 채용절차 모범규준도 은행들의 자율규제 형태인 만큼 이를 어기더라도 금융당국이 제재하거나 강제할 수단은 없다.
최종구 금융위원장이 은행의 ‘과다 대출금리’ 문제가 불거진 뒤 법적 근거가 없어 제재를 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 까닭이다.
최 위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회를 향해 금융관련 법안의 "빠른 입법을 부탁드린다"고 간곡하게 말하곤 했다.
반면 시민단체인 금융소비자원은 “금융위와 금감원은 모범규준이 무슨 ‘금송아지’라도 되는 듯이 입에 달고 있다”며 “모범규준을 백만 번, 천만 번 개정해도 같은 사태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대책다운 대책은 은행법, 시행령, 감독규정, 은행 내규를 어떻게 개정할 지를 명확히 제시하는 것이지 모범규준 개정은 대책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이 문제가 불거진 뒤에야 여론에 떠밀려 사후적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당장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모범규준 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 금융당국의 교묘한 ‘관치금융’ 논란 불러일으킬 수도
반대로 금융당국이 법적 근거 없이 금융회사를 대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고 있다는 비판도 동시에 제기된다. 또 애매하게 규정된 모범규준을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꿔 금융회사가 적용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 한 시중은행의 영업창구 모습.<연합뉴스>
금융당국이 ‘공정성’과 ‘형평성’이라는 가치를 앞세우면서 개별기업의 자율적 판단영역이 있어야 할 곳까지 모호한 모범규준의 규정을 통해 개입하는 기형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회사의 한 관계자는 “금융당국은 최근 어떤 문제나 이슈가 생겼을 때 명확한 기준과 대안을 제시하기보단 ‘문제가 있는 것 같으니 자율적으로 개선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아무런 근거없이 금융당국의 권위를 앞세워 알아서 눈치껏 맞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권이 바뀌거나 금융당국의 판단이 바뀔 때마다 금융회사가 가장 앞에서 여론의 뭇매를 맞아야하는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모범규준'이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모범규준이 마련됐지만 사실상 그 내용이 모호해 임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점도 비판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출금리 산정' 문제도 은행연합회에서 2012년에 처음으로 ‘대출금리 산정체계 모범규준’를 마련했지만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아 은행들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컸던 것으로 금감원 조사 결과 나타났다.
금융권 관계자는 “모범규준은 제대로 활용하면 자율이라는 가치를 살릴 수 있지만 잘못 쓰면 금융당국이나 금융회사 양쪽 모두 힘들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며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경영활동을 할 영역과 금융당국으로부터 통제받을 영역을 가늠해줄 입법절차가 조속히 진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비즈니스포스트 최석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