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B2B사업을 해선 안 된다. 특히 사업을 크게 하려거든 B2C사업을 하라.”

창업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다들 어리둥절해 할 것이다.

“B2B든 B2C든 유망한 것을 하면 되는 것 아닐까? 꼭 B2C를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에선 B2B를 하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법이라도 있는 걸까?”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B2B사업을 해서 성공하기란 참 어렵다. 물론 성공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판단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내가 말하는 성공은 B2B사업으로 대기업이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 B2B사업으로 소규모 회사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중견기업을 넘어 대기업으로 키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경제가 재벌그룹체제이기 때문이다. SI사업을 예를 들어 보자. SI기업을 창업해 일정한 규모까지 키우는 것은 가능하다. 괜찮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작지만 탄탄한 기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이 회사가 중소기업을 넘어 계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회사가 커지려면 일거리가 늘어나야 한다. 기업을 고객으로 하는 B2B사업의 특성상 자연스럽게 대기업과 거래할 필요성이 생기는 것이다.

  한국에서 B2B기업이 못 크는 이유  
▲ 한국의 경제 생태계는 큰 나무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작은 나무가 자리할 공간이 줄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대기업은 대개 재벌그룹의 계열회사들이다. 대기업 가운데 재벌그룹 소속이 아닌 단독기업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이들 계열회사들은 같은 그룹의 계열회사끼리 거래한다. 삼성전자나 삼성물산 등 삼성그룹의 계열회사들은 대부분 삼성SDS에 일을 맡긴다. 마찬가지로 LG그룹은 LGCNS에, SK그룹에 SKC&C에, 그리고 현대차그룹은 현대오토에버에 프로젝트를 발주한다.

이들만이 아니다. 10대 그룹은 물론이고 30대그룹의 대부분이 그룹의 SI사업을 담당하는 계열사를 두고 이곳에 일을 맡긴다. 그러니 그룹에 속해 있지 않은 전문 SI회사들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런데 재벌그룹을 제외하면 고객이 별로 없다. 정부부처나 공기업, 은행 같은 금융기업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이들 시장을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진다. 게다가 얼마 안 되는 공공시장과 금융시장마저 재벌 계열 SI회사들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룹 계열회사가 아닌 전문 SI회사들의 설자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SI사업만이 그런 게 아니다. 대표적 B2B사업인 광고도 그렇다. 삼성그룹에 제일기획이, 현대차그룹에 이노션이, LG그룹에 HS애드가, SK그룹에 SL플래닛이 광고사업을 하고 있다. 10대 그룹들은 대부분 광고회사를 계열사로 두고 있다.

중하위 그룹 가운데 광고물량이 많은 그룹은 대부분 이런저런 방식으로 광고회사를 거느리고 있다. 광고시장의 대다수가 자급자족 구조인 셈이다. 남은 것은 SI처럼 정부와 공기업 등 공공부문과 금융기업뿐이다. 그런데 이런 시장은 규모가 작다. 더구나 이 시장마저 그룹 계열회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이렇다보니 독립광고회사들은 설자리가 없다. 한 때 잘 나가던 독립광고회사들은 주요 그룹의 광고물량이 계열회사로 쏠리자 급격하게 매출이 줄었다. 과거 독립광고회사가 주도하던 시절의 기억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최근 상황을 듣게 되면 “어, 그 회사가 그렇게 됐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잘 나가던 회사였는데, 왜 그렇게 됐지”라는 질문은 사정을 듣고 나면 “그렇구나”라는 한숨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한국에서 기업에 제품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B2B사업은 성장하기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다. 재벌들은 어떤 상품이나 서비스의 B2B시장이 조금 커질 만하면 그룹 차원에서 사업부나 계열회사를 만들어 계열회사가 필요한 물량을 공급한다.

이들은 자체 물량 소화에 그치는 게 아니다. 남아 있는 시장에까지 발을 들여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독립적으로 B2B사업을 하는 기업들의 성장발전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이 때문에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기업들, 세계적 수준에 오른 기업들은 대부분 B2C사업을 영위하고 있다. 재벌체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B2C시장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면 B2B기업들은 일정한 수준까지는 크지만, 거기까지다. 그룹 계열회사들과 거래에서 오는 한계 때문에 성장이 멈춰 있다.

기업은 대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경쟁력을 갖춘 뒤 세계시장에 진출한다. 그런데 내수시장이 없으니 경쟁력있는 기업이 탄생하기 어려운 것이다. 경제규모가 세계 15위권인 데도 세계적 수준의 B2B기업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런 환경이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세계적 수준의 B2B기업이 한국에서 출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경제의 생태계가 건강하려면 풀도 있어야 하고 키가 작은 관목도 있어야 한다. 큰 나무만 있으면 숲이 유지되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의 경제 생태계는 갈수록 큰 나무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큰 나무만 자꾸 커지면서 작은 나무가 자리할 공간이 계속 줄고 있다. 벌써 일부 작은 나무는 시들어 죽고 있다.

큰 나무들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가지를 꺾고 몸집을 줄여 작은 나무의 생존공간을 만들어 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태생적으로 기업은 이익을 따라 가는 존재이지 윤리적이거나 철학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책이 필요하고 정책당국자의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정책 당국자들이 전문가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비즈니스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됐다.

한국기업인들의 비즈니스 자질과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따라서 여건만 갖춰진다면 B2C기업에 필적할만한 B2B기업을 키워낼 수 있다. 한국을 대표할만한 B2B기업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싶다. 또 그런 기업을 키워내는 CEO를 만나고 싶다.

신현만은 한국 최대 헤드헌팅회사인 커리어케어의 회장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한양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한겨레신문에서 창간 때부터 기자를 했고 한겨레신문 자회사 사장을 맡아 경제주간지를 발행하고 컨설팅사업을 전개했다. 아시아경제신문사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보스가 된다는 것> <능력보다 호감을 사라> <회사가 붙잡는 사람들의 1% 비밀> <이건희의 인재공장> 등 많은 베스트셀러의 저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