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효성 승계구도, 절박한 조석래  
▲ 왼쪽부터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조현준 사장, 이상운 부회장

탈세 등의 혐의로 재판으로 넘어간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이 지난 17일 대형로펌 변호사들로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렸다. 김앤장과 태평양 소속 변호인 10명이 참여하고 있다. 9명은 판사 출신이고, 이중 4명은 담당재판부와 연수원 동기다. 치열한 법정공방을 예고하는 한편으로 전관예우를 기대하는 모습이다.


조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다. 나이도 79세다. 감옥 가는 일은 꼭 피하고 싶을 것이다. 최고의 변호사들로 대규모 변호인단을 꾸린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유가 전부는 아닌 듯 싶다.


재판에 조 회장 혼자만 회부된 게 아니다. 그룹의 2인자로 13년 동안 효성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조 회장을 그림자처럼 보필해 온 이상운 부회장, 앞으로 효성그룹 경영권을 물려받을 조 회장의 장남인 조현상 사장도 함께 재판을 받고 있다. 모두 실형을 선고받을 경우 자칫 후계구도 자체가 깨지는 최악의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그룹의 존망이 걸려있는 재판인 것이다.


이상운(62) 부회장이 누구인가? 조 회장은 그동안 이 부회장을 잭 웰치 전 GE 회장에 비유하며 효성을 이끌어갈 전문경영인으로 추켜세웠다. 그만큼 이 부회장에 대한 조 회장의 신임은 절대적이다.


조 회장은 이 부회장과 ‘동행’하며 오늘의 효성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 회장이 특유의 글로벌 감각으로 해외사업을 주도했다면, 이 부회장은 조 회장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효성그룹의 국내사업을 키웠다.


특히 이 부회장은 2002년 효성 총괄사장에 오른 뒤 굵직굵직한 인수합병을 성사시켰다. 효성을 섬유회사에서 산업용 소재와 장치 제조기업 중심의 그룹으로 탈바꿈시킨 1등 공신이다. 그런 능력을 인정받아 13년 동안 효성의 대표이사를 맡아 “직업이 CEO”라는 말을 들을 정도다. 이 부회장은 롯데쇼핑 이인원 부회장에 이어 두 번째로 장수한 CEO다.


이 부회장은 서울대 섬유공학과 출신으로 1976년 효성물산에 입사했다. 그는 1998년 효성물산이 자금난에 빠졌을 때 남들이 꺼려하는 재무담당 임원을 자청해 맡았다. 이 부회장은 문턱이 닳도록 은행문을 들락거리고 관계자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마침내 금융권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자금줄이 꽉 막혔던 효성에 숨통을 트이게 한 공신이 바로 이 부회장이다. 효성물산의 당시 자금난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였다.


이 부회장은 이를 계기로 조 회장의 전폭적 신임을 받았다. 그 뒤 이 부회장은 고속승진을 이어갔다. 1998년 전무로 승진하는 동시에 비서실장으로 발탁돼 조 회장을 측근에서 보필하게 된다. 2001년 전략본부장을 거쳐 2002년 전략본부장 겸 효성 총괄사장이 되면서 효성그룹의 확고한 2인자 자리에 올랐다.


이 부회장은 조 회장에게도 할 말은 하는 소신파로 알려져 있다. 일 처리에 빈틈이 없으며 일을 할 때 아랫사람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몰아친다고 한다. 전날 아무리 밤 늦게까지 술을 마셔도 아침이 되면 깔끔한 모습으로 출근할 만큼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뛰어난 패션감각으로 그룹 안에서도 베스트 드레서로 통한다.


이 부회장은 ‘레터 경영’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2004년부터 임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해 매월 ‘CEO 레터’를 보낸다. 이를 통해 일상생활에서 얻은 교훈과 독서를 통한 깨달음, 국내외 경영혁신 사례 등을 임직원들과 공유한다.

  흔들리는 효성 승계구도, 절박한 조석래  
▲ 이상운 효성 대표이사 부회장 <사진=뉴시스>

이 부회장은 효성그룹의 3세 승계 핵심이다. 


조 회장은 3남을 두고 있다. 장남 조현준(47) 사장과 삼남 조현상(39) 부사장이 그룹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차남 조현문(45)씨는 주식을 모두 팔고 변호사의 길을 걷고 있다. 차남 조씨가 그룹 경영에 손을 뗀 것은 조 회장 가신그룹들이 조씨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를 조 회장에게 전해 후계구도에서 탈락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장남과 삼남이 형제경영 방식으로 그룹 경영에서 중추적 일을 맡으면서 경영권 승계에 대비하고 있다.


조 회장은 이 부회장에게 아들의 경영수업을 맡겼다. 이 부회장이 2001년 전략본부장이 됐을 때 조 회장의 세 아들은 모두 전략본부에서 일하며 이 부회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사실상 이 부회장이 조 회장 아들들의 경영 지도교사였다.


이 때문에 이 부회장이 그룹 내 수많은 선배들을 제치고 2002년 효성 총괄사장직에 오르자 조 회장이 3세 경영체제를 앞두고 본격 세대교체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 부회장을 징검다리 삼아 그룹의 경영권을 아들에게로 넘기려는 구도를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은 설득력이 있다. 조 회장은 80살을 목전에 두고 있다. 두 아들은 아직 40대 전후로 젊다면 젋은 나이다. 반면 이 부회장은 60대다. 조 회장은 효성의 경영권을 아들에게 넘기는 과정에서 이 부회장이 그 연륜으로 후견인이자 튼튼한 버팀목 역할을 해 줄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재판으로 이런 후계 구도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조 회장뿐 아니라 이 부회장과 장남 조현준 사장까지 모두 재판에 회부돼 있다. 재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삼남 조현상 부사장밖에 없다.


최악의 경우 조현상 부사장을 제외한 모두가 경영에 손을 떼야 하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 효성그룹의 경영구도가 일순간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1998년 위기 이후 효성그룹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따라서 조 회장은 이번 재판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대형 로펌의 쟁쟁한 변호사들로 변호인단을 꾸려 검찰의 창 앞에 강력한 방패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이 부회장은 지난 2월 의미심장한 CEO 레터를 보냈다. 조 회장과 함께 기소돼 재판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보낸 레터였다. ‘선승구전(先勝求戰, 이기는 군대는 미리 이겨놓고 싸운다)’이 핵심내용이었다. 선승구전은 이순신 장군의 승리비결이다. 모두의 책임을 다 해야 할 때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재판을 앞둔 효성그룹의 분위기는 전투를 앞둔 이순신 장군만큼이나 절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