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석용의 10년 CEO 장수비결  
▲ 차석용 부회장(오른쪽)이 지난 2012년 1월에 열린 LG그룹 글로벌 CEO 전략회의에서 구본무 LG 회장이(왼쪽)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다. 제 아무리 막강한 권력이라고 해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올해로 CEO가 된 지 10년째로 접어든다. 권불십년이라는 말에 도전하고 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거뜬히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 차 부회장에게 권불십년은 통용되지 않을 것 같다.

거대 그룹에서 이런 장수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CEO스코어가 지난해 10월 500대 기업 전문경영인을 놓고 조사한 결과 임기 3년을 넘긴 CEO는 3명 중 1명에 불과했다. 그룹의 규모가 클수록 전문경영인의 재선임 비중이 낮다. 5대 그룹의 경우 삼성의 재선임 비율이 3.3%로 가장 낮고 LG는 33%로 제일 높다. 하지만 차 부회장처럼 1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는 CEO를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차 부회장의 장수비결은 물론 ‘실적’이다. 차 부회장이 2005년 LG생활건강 사장으로 취임한 이후 LG생활건강은 말 그대로 눈부신 성장을 해오고 있다. 2005년의 매출액은 9678억 원, 영업이익은 704억 원이었다. 지난해 매출액은 4조3263억 원, 영업이익은 4964억 원이다. 매출액은 4.5배, 영업이익은 7배 증가했다. 연 매출액이 4조 원을 넘어선 것도 LG생활건강 창사 이래 처음이다. 1년에 1조 원 매출을 할까 말까 하던 회사가 분기에 1조 원 매출을 거뜬히 하는 회사로 탈바꿈 했다.

LG생활건강의 가장 큰 메리트는 CEO라는 말은 절로 나온 게 아니다. 이런 성장을 보여준 CEO를 내칠 오너는 없다. 당연히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신임도 각별하다.

LG그룹 CEO들은 구본무 회장이 참석한 가운데 매년 6월 그룹의 중장기 전략을 점검하는 회의를 연다. 이른바 ‘LG중장기 전략보고회’다. 이 행사에서는 항상 어느 계열사가 가장 먼저 보고를 하느냐가 주목받는다. 하루에 한 계열사씩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하는데, 맨 처음 발표를 하는 회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그룹 계열사에서 가장 기여도 높은 회사의 CEO가 등장한다. 이 전략보고회에서 차 부회장은 지난 2011년부터 3년 연속 맨 처음 발표를 했다. 차 부회장의 LG그룹 내 위상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차 부회장은 LG그룹 출신이 아니다.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 1985년 미국 P&G에 사원으로 입사했다. 1999년 P&G 한국총괄사장을 지내고 해태제과 사장을 지내다 LG생활건강 사외이사를 한 게 인연이 돼 2004년 12월 LG생활건강 사장으로 영입됐다. 한마디로 ‘샐리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2011년 12월 사장이 된지 7년만에 부회장에 올랐다. LG생활건강에서 부회장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차석용의 10년 CEO 장수비결  
▲ 권불십년이라고 하지만 차석용 LG생활건강 부회장은 그 통념을 깨고 장수 CEO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차 부회장은 ‘촉(觸)’의 CEO다. 소비자의 욕구를 알아내는 본능적 촉이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LG생활건강이 소비재 회사인 만큼 촉을 강조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차 부회장은 단지 강조에 그치지 않고 그 촉을 어김없이 내놓고 실행한다. 신제품 출시나 광고에서 어느 직원보다 앞선 촉을 보여준다. 2011년 12월 방송됐던 ‘전지현 헌정 광고’와 신제품 ‘한입세제’ 등 차 부회장의 촉이 발휘된 사례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촉은 M&A를 통해 LG생활건강의 성장을 이끈 비결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LG생활건강이 생활용품 중심 회사에서 M&A를 통해 음료와 화장품 등 사업의 포트폴리오를 완성하고 성장의 반석 위에 올라선 것도 역시 차 부회장의 촉 덕분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경영성과가 차 부회장의 오늘을 말해주는 전부는 아니다. 경영성과를 내도록 하는 것이 리더십이다. 직원들의 신뢰를 얻고 묶어낼 수 있는 리더십이 있어야 한다. 오히려 장수 CEO의 비결은 리더십이고, 그 리더십의 산출물이 경영성과일 수도 있다.

차 부회장의 리더십 코드는 ‘탈권위’와 ‘탈형식’으로 정리된다.

차 부회장의 집무실은 항상 열려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누구든 필요하면 거리낌 없이 들어갈 수 있다.그는 취임 직후부터 직원들 사이에 ‘차석용 쇼크’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파격적 행보를 보였다.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하라는 지시를 내기도 했다. "회사에 100% 투자하는 사람은 회사를 망치는 사람"이라며 자기계발에 투자할 것을 권했다. 회의 횟수와 시간을 줄이는 간결한 회의 문화도 확산시켰다. 회의할 시간에 오히려 '고객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까'를 더 고민하라는 주문이었다.

차 부회장은 "리더보다 치어리더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CEO는 임직원들을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는 개방적 토의를 통해 임직원들의 말을 직접 듣고 의사결정을 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미국 P&G에서 일한 경험이 바탕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사전에 통보하지 않고 택시나 기차를 이용해 혼자 현장을 방문하기도 한다. 차 부회장은 "CEO가 간다고 미리 알리면 사업장이나 연구소에서 의전과 자료 준비에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고 반문하기도 했다.

차 부회장은 '화장실 경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LG생활건강 사옥 화장실에는 차 부회장이 직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칸칸마다 붙여놓는다. 격려나 충고, 삶에 대한 얘기 등이 적혀있는데, 가끔씩은 CEO로서 깊은 고민을 내비치는 글도 있다고 한다.

가령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전한다고 한다. "외부에서 우리 회사가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 회사가 고난 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매일 전쟁을 치르고 들어간다. 외부에서 잘한다는 칭찬에 우쭐대기보다 겸손하게 매일 자신과 전쟁을 잘 치러 달라." 잘 나갈 때 스스로를 경계하자는 주문인 것이다.

이런 글도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반드시 옳고 그름'이 없는 사회과학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해도 조직의 절반은 지지하지 않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영에서는 Accuracy(정확성)보다 Consistency(일관성)가 훨씬 중요하고, 해볼 만한 시도라고 생각될 때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실패하더라도 칭찬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직원들에게 주문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선택의 기로에 서있는 CEO로서 깊은 고민이 묻어나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