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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섭 유한양행 사장(왼쪽)과 조순태 녹십자 사장 |
유한양행과 녹십자가 ‘제약업계 최초 연매출 1조 원’을 넘어서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내 제약시장 규모는 13조 원 정도다. 세계시장의 1%에 불과하다. ‘공룡’ 제약회사로 불리는 화이자의 연간매출이 63조 원인 점을 감안하면 ‘구멍가게’ 수준이다.
이 때문에 연매출 1조 원을 넘어서는 것은 국내 제약회사가 글로벌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첫 관문을 통과한다는 뜻으로 통한다.
그러나 연매출 1조 원은 120년이 넘는 국내 제약업계에서 ‘마의 벽’으로 존재한다. 독자적 연구개발 능력이 부족한 데다 시장규모도 작아 영세한 수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동아제약은 46년 동안 제약업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며 여러 차례 1조 원 매출 고지를 눈앞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번번이 약가인하 등 국내 규제환경에 부딪쳐 실패했다. 동아제약은 동아ST와 동아제약으로 나뉘면서 1위 자리를 유한양행에게 넘겨줬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창립이후 처음으로 업계 매출 1위에 올랐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매출 9316억 원으로 녹십자(7777억 원)를 1593억 원 차이로 따돌렸다.
유한양행은 올해 상반기에도 매출 4803억 원을 기록해 녹십자(3783억 원)보다 월등한 실적을 보였다. 그러나 하반기 들어 녹십자가 사상 최대 분기매출을 달성하며 격차를 좁히고 있다.
김윤섭 유한양행 사장과 조순태 녹십자 사장은 매출 1조 원 고지로 달려가기 위해 차별화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김 사장과 조 사장은 둘 다 업계에서 알아주는 ‘영업맨’이다. 그러나 경영전략은 판이하다.
김 사장은 강력한 영업력을 통한 외형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반면 조 사장은 연구개발을 중심으로 내실을 먼저 다지려 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올해 유한양행과 녹십자가 나란히 1조 원 매출에 도달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되면 한국 제약업계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다.
주목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두 회사의 다른 전략이 1조 원 매출 달성하는 과정에서 회사를 어떻게 바꿀지 제약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 김윤섭, 유한양행 3년 새 몸집 키운 영업의 비밀
김 사장은 2012년부터 단독대표체제를 맡은 뒤 3년 만에 유한양행의 몸집을 크게 키워냈다. 유한양행은 2011년 매출 6676억 원이었으나 2012년 3위를 거쳐 지난해 매출 9316억 원으로 드디어 1위에 올랐다.
김 사장은 "유한양행의 강력한 영업력은 단기적 성장을 이끌 수 있을 것"이라며 "우선 외형이 커야 이익도 좋아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 사장은 중앙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해 1976년 유한양행에 입사했다. 그뒤 줄곧 ‘일등 영업사원’으로 업계 안팎에 이름을 알렸다. 그는 이런 이름 덕분에 2009년 유한양행 영업본부장에서 바로 사장으로 승진했다.
김 사장은 사장 취임 이후 다국적제약사의 유명한 약을 국내에 들여와 파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현재 유한양행 전체 매출의 70%를 차지한다. 수입의약품인 고혈압 치료제 ‘트윈스타’와 B형간염 치료제 ‘비리어드’ 등이 주로 유한양행의 성장을 이끌었다.
김 사장은 2009년 정부가 리베이트 영업을 금지하자 직원들에게 ‘발품영업’을 주문하며 영업력을 키웠다.
그는 “리베이트를 하지 않아 매출이 줄어도 인사상 불이익을 주지 않겠다”며 “대신 하루에 20곳 이상의 병원을 방문하는 성의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유한양행은 지난해 영업사원이 병원을 가장 많이 방문한 제약회사 1위에 올랐다.
김 사장이 이렇게 정도영업에 나서자 리베이트 영업을 꺼리는 다국적제약사가 먼저 유한양행에 ‘러브콜’을 보내왔다.
이 덕분에 유한양행은 다국적제약사 상품만으로 지난해 2500억 원의 매출을 만들어 냈다. 김 사장은 “외국회사 제품을 들여와 파는 것도 영업 경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했다.
유한양행은 3분기까지 7394억 원의 매출을 기록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이 9.8% 늘었다.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9% 늘어난 435억 원을 기록했다.
제약회사 매출이 보통 상반기보다 하반기에 늘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유한양행은 올해 연매출 1조 원을 수월하게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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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윤섭 유한양행 사장(가운데)이 지난6월 사단법인 한국경영인협회이 주최한 '대한민국 최고기업/ 최고CEO 대상' 제약부문 최고CEO로 선정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 김윤섭의 강력한 영업력은 득이 될까 실이 될까
유한양행은 매출이 늘다 보니 보유현금도 풍부해졌다. 유한양행은 국내 제약회사 가운데 부채비율이 가장 낮아 재무건전성이 좋은 회사로 꼽힌다.
유한양행은 1분기 말 기준으로 사내 유보금이 1조2382억 원에 이른다. 국내 10대 제약회사 유보금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에 비해 17.6%나 늘어났다.
그러나 수입의약품 유통방식에 한계도 보인다.
보유현금은 늘었지만 회사가 실제로 얻는 영업이익률은 낮아졌다. 다국적제약사에서 약을 들여오면서 로열티나 운송비 등 비용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유한양향은 2011년 14%를 웃돌던 영업이익률이 최근 5% 내외로 떨어졌다.
연구개발비 비중도 크지 않다. 유한양행은 매출 대비 연구개발비가 5% 수준에 불과하다. 한미약품 15.8%, 녹십자 12.6%, 대웅제약 8.9%에 비해 연구개발비 비중이 낮은 편이다.
이 때문에 업계의 시선은 그리 곱지 않다. 유한양행은 다국적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을 독점판매하는 등 탄탄한 영업력을 과시한다. 하지만 신약개발 투자가 적은 탓에 장기적으로 도태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제약 전문가들은 “타사 제품을 가져와 파는데 주력하고 있다면 그 회사는 제약회사라기보다 유통회사”라며 “장기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해 해외 제약회사들과 견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문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등록된 신약 20개 가운데 유한양행이 개발한 신약은 2005년 개발한 '레바넥스'가 유일하다. 연매출 1조 원을 기록한 제약회사가 올린 성과라고 보기에 초라하다.
그러나 김 사장은 다국적제약사와 제휴를 맺는 강한 영업력이 향후 신약개발에도 득이 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는 “신약을 개발하더라도 그것을 잘 팔려면 다국적제약사와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지금 하고 있는 공동마케팅은 다국적제약사와 신뢰를 쌓아가는 한 과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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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순태 녹십자 사장이 지난해 태국에서 혈액제제 공장 준공계약을 체결하고 기념촬영하고 있다. 왼쪽부터 소이상 태국 국립중앙혈액원장, 판 태국적십자 사무총장, 조순태 녹십자 사장, 김영호 녹십자 부사장 |
◆ 조순태, 녹십자 내실 다지면서 성장 가능할까
녹십자는 하반기 들어 자체개발한 독감백신의 수요가 크게 늘어 실적에 큰 도움을 받고 있다. 또 혈액제제 등 연구개발에 힘을 쏟은 결과 해외시장에서 성장 잠재력이 커졌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녹십자의 3분기까지 누적 매출은 7173억 원으로 유한양행(7394억 원)과 200억여 원 차이가 난다. 녹십자는 3분기에 제약업계 사상 최대 분기매출을 달성해 유한양행과 차이를 좁혔다.
누적 영업이익을 기준으로 하면 녹십자가 오히려 앞서간다. 녹십자는 3분기까지 누적 영업이익이 444억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8% 늘었다. 반면 유한양행은 3분기까지 영업이익이 435억 원에 그쳤다.
조순태 사장은 중앙대학교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했다. 복지기관에서 상담사를 하다가 1981년 우연한 기회에 녹십자에 입사해 영업외길 인생을 걷게 됐다.
조 사장은 2010년부터 공동대표를 지내다 2013년 단독대표이사가 됐다. 그는 사장에 오른 뒤 줄곧 내실을 키울 수 있는 연구개발을 강조해 왔다. 연구개발로 만든 독감백신 수출을 늘려 ‘규모의 경제’를 이루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녹십자는 2010년 신종플루 관련 백신을 개발해 동아제약에 이어 업계 2위에 올라섰다. 조 사장은 당시 “녹십자는 연구개발 역량을 총동원해 빠른 시일에 글로벌 신약을 탄생시킬 것”이라며 “회사 매출의 50% 이상을 해외수출로 일구겠다”고 밝혔다.
조 사장은 해외수출을 2011년 814억 원에서 지난해 1517억 원으로 두 배나 늘렸다. 올해에도 성장세가 지속돼 3분기까지 수출액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0% 늘어난 1357억 원을 기록했다.
조 사장은 최근 “창사 이래 최초로 수출 1억 달러를 돌파했다”며 “삼성이 마하경영을 하는 것처럼 국내 제약산업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 사장이 이처럼 변화를 강조하고 나선 이유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통상 내수용이 아닌 글로벌 시장에 통하는 신약을 개발하는 데 10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 때문에 단기성과를 내면서 장기적 흐름을 함께 이어가는 전략을 취할 수밖에 없다.
조 사장은 최근 제약업계 최대 규모인 녹십자연구소를 기반으로 중국 등지에서 빠르게 영향력을 키우려 한다. 또 녹십자의 진단시약부문 자회사인 녹십자MS를 12월 중 상장해 글로벌시장 진출에 필요한 연구개발 자금을 마련하려고 한다.
◆ 국내 제약업계에서 ‘연매출 1조 원’의 의미
국내 제약업계는 규모가 작아 신약개발을 하기 어려운 구조에 놓여있다. 제약회사가 신약개발을 진행하고 싶어도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신약개발에 들어가는 비용은 세계적으로 늘고 있는 추세다. 세계제약협회연맹에 따르면 1975년 신약 1개를 개발하는 비용은 1억3800만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10배 늘어난 13억 달러에 이른다.
이처럼 신약개발 위험이 커지면서 다국적제약사들은 몸집을 있는 대로 키워 재원과 기술을 동시에 마련하려 한다. 세계 4위 제약회사인 화이자도 세계 9위 아스트라제네카의 인수합병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연매출 1조를 넘어서는 것은 영세한 국내시장에 머물던 국내 제약회사들이 글로벌 제약회사들과 견줄 체격을 어느 정도 갖추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재국 한국제약협회 상무는 “1조 원이라는 금액이 대기업 관점에서 보면 별 의미 없을 수 있지만 제약업계 입장에서 글로벌시장 진출을 위한 기초체력을 길렀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한국보건진흥협회가 발표한 2012년 세계 50대 제약회사 순위에 미국 17곳, 일본 9곳, 스위스 5곳이 올랐다. 미국 화이자는 매출 63조 원이라는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꼴찌순위인 남아공 제약회사 아스펜도 매출이 1조9천억 원에 이른다.
국내 제약회사들의 이름은 100위권 내에서 찾을 수 없다. 결국 글로벌 제약사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갖추려면 국내 제약회사들이 독자적 신약을 개발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몸집을 키워야 한다. 그 첫 단계가 바로 매출 1조 원인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부터 2020년 세계 7대 제약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제약산업 육성 지원 5개년 종합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제약산업 육성에만 지원하기로 한 300억 원의 예산이 의료기기 화장품 병원 등 보건산업 전반을 지원대상으로 삼으면서 빛이 바라고 있다. [비즈니스포스트 이계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