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이 낮은 사건은 발생하기 어렵다. 확률이 어느 한계를 넘어 극도로 낮은 수준이라면 그런 일은 발생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합리적이다.

무한히 많은 원숭이를 특별히 튼튼하게 만들어진 타이프라이터 앞에 앉혀놓고 멋대로 자판을 치도록 한다면 그들 중 하나가 '일리아스'를 한 글자도 틀리지 않게 써내는 일이 가능할까?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그린 1만5693행의 대서사시 일리아스 말이다.

  원숭이는 호메로스가 될 수 있을까  
▲ 백우진 한화투자증권 편집국 편집위원.
나는 직장인 10명에게 물어봤다. 답변은 '가능하다'와 '불가능하다'가 반반으로 나왔다.

독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렇다'와 '아니다'의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 사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을 선택하겠다고 답변하는 독자도 계시리라.

그 스펙트럼의 한쪽 끝은 '확률이 극도로 미미하지만 가능하긴 하다'이고 반대편 끝은 '가능하기야 하지만 확률상으로 보면 0이나 마찬가지'이다.

이 물음은 '블랙 스완'으로 유명해진 투자자이자 저자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행운에 속지 마라'에서 꺼냈다. 이 사고실험에 대해 탈레브는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확률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낮다"면서도 "무한대 원숭이 중 하나가 일리아드의 정확한 버전을 들고 나올 것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이 질문의 원형은 프랑스의 수학자 에밀 보렐(1871~1956)이 제시했다.

보렐은 1943년 써낸 확률론 입문서 '확률과 삶'에서 원숭이들이 타자기를 아무렇게나 두드린 결과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이 타이핑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을까 하고 물었다.

◆ 보렐의 법칙 "확률 아주 낮은 일은 발생하지 않아"

보렐은 "이런 유형의 사건은 그 불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더라도 사리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누군가가 이런 사건을 목격했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그가 우리를 속이고 있거나 아니면 그 역시 사기를 당했다고 확신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보렐은 어떤 사건이 인간의 관점에서 발생 확률이 워낙 낮다면 언젠가 일어나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본다.

그는 그런 사건은 불가능하다고 간주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확률이 아주 낮은 사건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보렐의 법칙'으로 불린다.

확률이 얼마나 낮으면 무시해도 무방한가. 그는 몇 가지 수치로 예를 들었다.

영국 수학자 데이비드 핸드는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제목으로 번역된 책에서 보렐의 '불가능한 확률' 네 단계를 설명했다.

- 현실에서 아주 낮은 확률이란 약 100만 분의 1보다 낮은 확률이다.

- '지구적 규모에서 무시할 수 있는 확률'이란 약 10^15분의 1보다 작은 확률이다. (^은 거듭제곱 표시. 10^15는 1에 0이 15개 붙은 수. 1억에 1000만을 곱한 값과 같음)

- '우주적 규모에서 무시할 수 있는 확률'이란 약 10^50분의 1보다 작은 확률이다. (10^50은 1에 0이 50개 달린 수)

- '초우주적 규모에서 무시할 수 있는 확률'이란 10^(10억)분의 1보다 낮은 확률이다. (10^10억은 1에 0이 10억 개 있는 수)

100만 분의 1 확률은 드물지 않다. 포커에서 로열 플러시를 잡을 확률은 약 65만 분의 1이라고 핸드는 설명한다.

로또에 맞을 확률은 약 800만 분의 1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여러 장을 사기 때문에 실제 확률은 그보다 낮아진다.

1에 0이 15개 붙은 수의 역수인 확률은 지구 표면을 1피트 정사각형으로 나누고 출제자가 그 중 하나를 지정했을 때 그 지점을 맞히는 확률이다.

1 다음에 0이 50개인 수의 역수인 확률은 지구 전체의 원자 중 하나를 맞힐 확률이다.

초우주적 규모에서 무시할 수 있는 확률에 대한 핸드의 설명은 무시, 아니 생략한다.

◆ "기회가 아주 많으면 드문 일도 발생"

보렐의 법칙은 '아주 큰 수의 법칙'과 상충하는 듯하다.

아주 큰 수의 법칙은 '아주 많은 기회가 있으면 아무리 드문 일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내용이다.

로또를 생각해보자. 800만 분의 1 확률인 로또에서 당첨자가 나온다. 세계 모든 사람이 참가하는 로또가 있다면 70억 분의 1 확률에서도 당첨자가 곧잘 나올 수 있다.

보렐이 말한 '인간적 관점에서 워낙 낮은 발생 확률'은 어느 수준까지 낮출 수 있을까?

이는 달리 말하면 가능한 참가자(시행 가능한 횟수)의 숫자가 많아지는 사건은 그에 반비례해 상상 가능한 확률이 낮아진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이냐면, 전에는 100만 분의 1 확률은 무시해도 그만이라고 여겨졌지만 로또가 나오면서 가능한 확률이 된 것처럼 참가자나 시행 횟수가 늘어나면 발생하는 확률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세계 70억 명이 참가하는 로또가 생겨 시행되면 70억 분의 1은 실현 및 체감 가능한 확률의 영역으로 들어올 것이다.

내 생각에 확률이 극도로 낮은 사건은 아주 많은 기회가 주어져도 발생하지 않는 듯하다. 확률이 0에 가까이 갈수록 확률의 의미가 커지고 시행 횟수에는 별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이다.

탈레브의 문제로 돌아온다.

수많은 원숭이 중 하나가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가 될 수 있을까? 어차피 가상실험이니, 여기서는 원숭이를 컴퓨터로 대체한다.

다음 수를 고려해 문자가 입력될 칸이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하자.

서사시 일리아스각 행의 공백 포함 글자 수가 60이라고 하자. 그러면 이 대서사시의 공백 포함 글자 수는 약 9만 4천자가 된다. 이를 편의상 9만 자라고 하자. 컴퓨터 프로그램은 9만 칸으로 구성된다. 엔터키를 치면 9만 칸에 문자가 무작위로 뜬다.

문자는 몇 자인가. 알파벳은 26자인데 대문자와 소문자가 있으니 52자다. 쉼표, 마침표, 물음표 등 부호를 더해 60자가 쓰인다고 하자.

그러면 엔터키를 치면 뜨는 문자열의 조합은 60^(9만)이 된다.

가늠이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수치이다. 보렐의 기준을 적용하면 우주적 규모보다 훨씬 큰 수다.

세계 모든 컴퓨터가 빅뱅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인 138억 년 동안 1초에 한 번 이 문자열의 조합을 만들어도 이 수만큼의 경우가 나오지 않는다.

1년이 약 3153만 6000초이므로 138억 년은 4.35에 0이 17개 붙은 숫자다. 세계 컴퓨터 중 10억 대를 이 작업에 투입하면 0이 9개 더해져 26개가 된다. 이는 60^(9만)에 비하면 미미하기 그지없는 숫자다.

경우의 수가 60^(9만)이니, 컴퓨터가 호메로스가 될 확률은 이 수의 역수다. 확률은 사실상 0이다.

따라서 컴퓨터가 아무리 많고 오래 작업해도 결코 호메로스가 되지 못한다.

◆ 확률이 0일 때엔 시행횟수 무의미

탈레브는 원숭이의 숫자를 초초우주적인 규모로 늘려 10억^(10억) 마리로 예시하면서 그의 주장을 강화한다.

원숭이가 그렇게 많을 경우 그들 중 하나가 일리아스를 써낸다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탈레브가 든 10억^(10억)은 0이 몇 개인가? 10억의 10제곱이면 90개, 100제곱이면 900개, 1만 제곱이면 9만 개, 1억 제곱이면 9억 개, 10억 제곱이면 90억 개다. 보렐의 초우주적 규모보다 훨씬 큰 숫자다.

원숭이 수 10억^(10억)은 앞의 60^(9만)에 비해 어마어마하게 큰 수다. 그러나 확률이 사실상 0이므로 시행횟수 10억^(10억)은 의미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렇게 정리한다. 아주 큰 수의 법칙은 아주 많은 경우가 시행되면 특정 사건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매우 드문 특정 사건이 일어나려면 그 빈도와 비교해 많은 횟수가 시행돼야 한다.

그러나 보렐의 법칙은 극도로 드문 특정 사건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주장한다.

극도로 드문 확률이 어느 한계를 넘어 0에 가까울 때에는 보렐의 법칙이 큰 수의 법칙보다 우선한다고 나는 추측한다.

원숭이는 일리아스를 창작하지 못한다.

P.S. 까칠한 옵션 매수 트레이너인 탈레브는 책 '블랙스완'에서 주장한 것처럼,사람들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긴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가 극단적인 원숭이 사고실험을 제안하고 경이로울 정도로 특이한 결과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백우진은 호기심이 많다. 사물과 현상을 종횡으로 관련지어 궁리하곤 한다. 책읽기를 좋아한다. 글쓰기도 즐긴다. 책 『백우진의 글쓰기 도구상자』『글은 논리다』『안티이코노믹스』『한국경제실패학』『나는 달린다, 맨발로』를 썼다.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중앙일보 이코노미스트, 포브스코리아, 아시아경제 등 활자매체에서 기자로 일했다. 마라톤에 2004년 입문했고 풀코스 개인기록은 3시간37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