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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이 공격 경영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공격 경영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 정 회장은 그동안 추구했던 ‘내실과 성장’ 전략으로 많은 기회를 잃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인사를 통해 물갈이를 하고 도전정신을 강조하는 조직문화로 바꾸는 등 대대적인 변신을 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 회장의 방향전환 결과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유통 시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또다시 실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적 시각도 적지 않다.
3일 현대백화점 그룹에 따르면 지난달 27일 열린 정기 이사회에서 경청호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경 부회장은 다음달 21일 주주총회에서 퇴진이 확정되면 상근고문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이에 앞서 현대백화점을 이끌어왔던 하병호 사장도 지난해 연말 자리에서 물러났다.
최근 인사는 정 회장의 경영 스타일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 정 회장은 그동안 경쟁사 오너들에 비해 보수적 경영전략을 유지해 왔다. 그룹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경 부회장의 '내실과 성장' 전략에 기반을 두고 현대백화점을 경영해 왔다는 것이다. 이런 전략에 대해 전문가들은 현대백화점을 크게 위기에 빠뜨리지는 않았지만, 시장 변화에 둔감해 성장정체를 불렀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 정 회장이 예전에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정 회장도 그동안 경영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한국의 경제상황을 고려할 때 기존 경영방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위기를 기회로 바꿔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이런 말을 곧바로 실천에 옮기고 있다. 경 부회장의 퇴진은 그 신호탄이었다. 또 최근에는 현대백화점과 가든파이브관리단이 지난해 말 아울렛 개점에 대한 상호 양해각서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오는 9월 개점을 목표로 하는 현대백화점 1호 아울렛은 롯데 아울렛 이천점에 이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다. 영업면적만 4만9,000㎡에 이른다.
◆ 과도한 몸 사리기로 번번이 때를 놓쳐...
정 회장은 지금까지 신중론자였다. 그는 경기침체로 유통업계가 위기에 있는 상황에서 내실을 다지며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판단했다. 경쟁사인 롯데그룹과 신세계그룹이 적극적 투자로 경기침체를 돌파하는 것과 정반대 전략이었다.
정 회장은 2007년 12월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2009년을 제외하고 매년 단 한 개씩만의 매장을 늘렸다. 매장 수 늘리기에 급급하기보다 조직의 체질개선과 사업 다각화에 초점을 뒀다. 정 회장은 2012년 1월 패션업체인 한섬을 인수했고 2013년 6월 가구업체인 리바트를 인수했다.
그는 이런 지나친 신중함 때문에 성장 기회를 수차례 놓쳤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정지선(停止線)’ 회장이라는 조롱섞인 별명이 붙기도 했다.
대표적 사례가 백화점 경영의 실기다. 매장확대에 보수적인 정 회장은 조직 슬림화에 일단 성공했다. 2003년 150%에 달했던 부채비율은 지난해 46.4%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지나친 긴축경영 때문에 유통망이 크게 축소됐다. 슬림화를 통해 지난해 홀로 플러스 성장을 기록했지만 소극적 투자로 성장동력을 잃었다. 그 결과 정 회장 체제에서 현대백화점은 시장점유율 3위로 떨어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현대백화점의 지난해 3분기 시장 점유율은 19.3%다. 업계 3위였던 신세계는 20.4%를 차지해 현대백화점을 뒤로 밀어냈다. 경쟁사인 롯데는 45%를 차지해 업계 1위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문제는 한 분기만 점유율만 하락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정 회장이 취임했던 2007년 말 현대백화점의 점유율은 28.2%였다. 신세계는 17.8%를 기록해 거의 10%이상 뒤쳐져 있었다. 신세계가 성장을 이어가는 동안 현대백화점은 오히려 뒷걸음질만 쳤다.
점유율 하락은 명품업체들의 잇따른 백화점 철수로 이어졌다. 지난 1월6일 유통업계는 해외명품 브랜드들이 현대백화점 부산점에서 매장을 철수하고 있다고 알렸다. 현재 부산점에서 철수한 업체는 루이비통과 에르메스이다. 루이비통은 지난해 초 철수했다. 에르메스도 지난해 9월 영업을 중단했다. 최후의 보루인 샤넬은 지난해 12월 말 계약이 끝났다. 샤넬도 곧 운영을 중단한다. 명품업체들이 현대백화점을 떠나는 이유는 매출부진이다. 점유율 하락이 부른 결과였다. ‘3대 해외명품’이 모두 철수하면서 현대백화점의 고급 이미지는 큰 타격을 입었다.
명품업체들의 탈출은 정 회장이 과감한 투자를 주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현대백화점은 1995년 부산에 문을 열었지만 그 이후 특별한 투자가 없었다. 반면 롯데와 신세계는 2007년과 2009년 각각 엄청난 금액을 투자해 센텀시티점을 개장했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부산점의 규모가 경쟁사보다 작은 데다 중심 상권이 해운대 등으로 옮겨져 명품업체들의 이탈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고 전했다.
정 회장이 올해 야심차게 추진하는 아울렛 사업도 뒷북이라는 것이 업계의 시각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현대백화점의 가든파이브 아울렛 입점에 대해 “현대백화점이 경쟁사에 뒤지다보니 무리수를 두고 있다”고 걱정했다. 이미 NC백화점이 있는 상태인데다 구분 소유자가 많아 빠른 개장이 어렵다는 것이다. 가든파이브가 개장 후 4년 동안 침체를 벗어나지 못한 것도 위험요소다.
정 회장이 뒤늦게 선택한 초대형 프리미엄 아울렛 사업은 성공을 예측하기 어렵다. 이미 롯데와 신세계가 프리미엄 아울렛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정 회장이 2007년 회장에 취임할 무렵 신세계는 여주에 국내 최초로 프리미엄 아울렛을 열었다. 2008년엔 롯데도 김해에 아울렛을 열었다. 두 경쟁사가 최대 인구 밀집 지역인 수도권과 부산권을 공략하는 동안 정 회장은 무려 6년 동안 지켜만 봤다.
백화점 관계자는 “롯데와 신세계가 이미 자리를 확고하게 잡은 사업 분야에 뒤늦게 뛰어들다 보니 현대백화점이 1등을 하는 사업이 하나도 없게 됐다”고 말했다. 또 “롯데나 신세계에 자꾸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니 내부적으로 경쟁력 상실에 대한 걱정이 높아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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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선 현대백화점 회장인 지난 1월 2일 오전 서울 노원구 중계동 백사마을에서 임직원들과 사랑의 연탄나눔 봉사시무식을 하고 있다. |
◆ 승부수 띄운 정 회장...성공은 아직 불투명
이런 상황에서 정 회장은 ‘공격 경영’을 내세우며 물갈이 인사를 하고, 직원들에게 도전을 강조하는 등 조직문화를 바꾸려 하고 있다.
우선 인사를 통해 친정체제를 강화했다. 경청호 부회장과 하병호 사장을 2선으로 물리는 대신 김영태 현대백화점 신임 사장과 이동호 기획조정본부장을 불러들였다. 백화점 수장 교체는 2008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이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김 사장은 현장 경험이 풍부한 영업통으로 침체된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를 드러냈다.
조직문화도 바꾸고 있다. 정 회장은 최근 시무식 때 새로운 사업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직원에게 ‘베스트 챌린저 상’을 줬다. 모두 29명이 이 상을 받았다. 정 회장은 “단기 매출에 연연하지 말고 신사업을 찾아 도전하라”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오랜 세월 동안 몸집 줄이기를 한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정 회장의 긴축경영에 따라 현대백화점그룹의 현금 보유액이 1조 원을 넘었다고 분석한다. 곧 투자에 충분한 실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얘기다.
정 회장은 이 실탄으로 매장을 늘리는 데 쓰려고 한다. 올해 가든파이브 아울렛과 더불어 김포점을 하반기에 개장한다. 김포점은 지난해 7월 착공했는데, 최대 2400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주차공간을 확보한 상태다.
또 지난해 착공에 들어간 판교 아울렛을 내년 개점한다. 정 회장은 ‘판교 알파돔시티 복합쇼핑몰’을 수도권 최대 규모로 지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그동안 롯데와 신세계가 양분해오던 수도권 남부 상권을 치고 들어가겠다는 것이 정 회장의 복안이다. 이와 함께 송도 아울렛도 2015년 개장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 송도점은 수도권 서부지역을 담당한다.
경쟁업체들과 정면 대결도 펼치려고 한다. 지난달 11일 현대백화점은 부산 기장군 동부산 테마파크 개발사업자인 CJ그룹과 상호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현대백화점은 부지를 임대해 아울렛 건립을 추진한다. 이미 이곳에는 신세계사이먼이 지난해 8월 ‘부산프리미엄아울렛’을 개장했다. 롯데도 지난달 10일 아시아 최대 규모의 프리미엄 아울렛인 ‘부산롯데복합쇼핑몰’ 기공식을 가졌다.
정 회장의 공격 경영의 성공 여부는 일단 현재 강력하게 추진중이 매장확대 전략이 매출로 성과를 내는 데 달려 있다. 만약 이 전략이 먹히지 않는다면 또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공격경영에서 다시 내실로 선회를 해야 하고 현대백화점은 성장정체의 깊은 늪에 빠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