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 악화 등 글로벌 경영에 직면한 상황에서 사내외 이사진을 여전히 관료, 교수, 내부 출신으로 채우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경쟁사인 대만 TSMC가 글로벌 반도체 전문가들을 이사진으로 구성해 사업 전문성을 높이고 세계 시장 경쟁력 강화에 나서고 있는데 비해 반도체 사업 위기에 직면한 삼성전자가 아직도 과거 구태의연한 이사진 구성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다.
또 실질적으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재용 회장과 정현호 사업지원TF장 부회장은 등기이사에 올라있지 않아, 경영 악화에 대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 회장은 21일 발표문을 내고 삼성전자의 새로운 사내외 이사진 후보 선정에 대해 비판했다.
이 회장은 “삼성전자는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에 현재 1명뿐인 반도체 전문가를 3명으로 늘려, 본격적 경쟁력 회복에 나서겠다고 개편 취지를 밝혔지만, 이는 이사회 역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시사한다”고 주장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전영현 DS부문장 부회장과 송재혁 최고기술책임자(CTO) 사장을 사내이사 후보로 선임하고, 이혁재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를 사외이사로 내정했다.
또 노태문 MX사업부장 사장과 허은녕 서울대 공과대학 교수, 유명희 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의 이사 재신임 안건을 내달 정기 주총에 상정키로 했다. 특히 신제윤 전 금융위원장을 감사위원으로 선임하고, 그를 이사회 의장으로 추대할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을 살리기 위한 사내외 이사 후보를 선정했다고 밝혔지만, 결과적으론 내부 반도체 전문가를 일부 이사로 선임했을 뿐, 과거처럼 관료나 교수 출신 인사로 이사진을 채우는 것에 그쳤다는 평가가 나온다.
모리츠 창 TSMC 전 회장은 최근 한 대만 언론과 인터뷰에서 “이사회 이사의 조건은 CEO 업계 경력을 갖추고, CEO 성과와 비슷하거나 CEO 성과를 능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며 “이사회 의장은 지혜, 판단력, 설득력으로 이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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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스 창 TSMC 창업자. < TSMC >
세계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1위를 독주하고 있는 TSMC의 이사진은 글로벌 경험이 풍부한 다양한 국적의 글로벌 인재들로 구성됐다.
TSMC의 이사회는 총 10명인데, 류더인 이사회 의장과 쿵민신 대만 국가발전협의회 장관, 정판정 전 부회장 외에는 모두 글로벌 네트워크와 기술, 시장 전문성을 갖춘 외국인들이다.
구체적으로 피터 본필드 전 BT그룹 CEO, 마이클 스플린터 전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 CEO, 모시 가브르엘로브 전 자일링스 CEO, 라프 리프 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총장 등이 TSMC 사내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국내 기업으론 현대자동차가 해외서 활동해온 전문가들을 새 이사진 후보로 선정한 것이 눈에 띈다.
현대차는 지난 19일 싱가포르 국적의 글로벌 금융사 애널리스트 출신인 벤자민 탄을 비롯해 퀄컴 아시아 부회장을 지낸 도진명 씨, 다국적 회계기업 출신 김수이 씨 등 3명을 사외이사 후보로 선정했다고 공시했다. 이들은 내달 20일 정기 주주총회를 거쳐 사외이사로 공식 선임될 예정이다.
탄 후보는 캐피탈 인터내셔널, 웰링턴매니지먼트, 싱가포르투자청(GIC) 아시아 등에서 애널리스트와 포트폴리오 매니저로 활동했다.
도 후보는 미국 보스턴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터프츠대에서 전자공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97년 퀄컴에 입사해 2011년 퀄컴 아시아 부회장에 오른 뒤 2017년까지 퀄컴 아시아 조직을 이끈 반도체 전문가다. 김 후보는 PwC, 맥킨지&컴퍼니, 칼라일 그룹,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등에서 일한 회계 전문가다.
현대차는 또 지난해 11월 호세 무뇨스 북미총괄을 대표이사에 선임했다. 현대차가 외국인 CEO를 선임한 건 설립 이래 처음이었다. 이와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검사, 주한 미국대사,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 등 미국 외교관으로 활동해온 성김 씨를 지난해 말 그룹 고문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측은 “삼성전자 이사회에 반도체 전문가는 전영현 부회장 한 명이면 충분하다”며 “삼성전자가 절실히 필요한 이사는 글로벌, 독립적 관점에서 쓴 잔소리를 할수 있는, 기업 경영을 직접 경험한 베테랑”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이번 삼성전자 사내외 이사 후보 선정이 아직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지 못해 등기이사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이재용 회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수준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재벌개혁위원장은 “삼성전자 이사진은 결국 총수가 시키는 대로 (의사결정을) 할 수밖에 없다”며 “미국 등 전문경영인 체제가 자리잡은 기업들에서나 이사진이 의미가 있지, 한국 재벌 기업 이사회는 총수에 반하는 내용을 말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박 교수는 “삼성전자가 위기 상황에서도 옛날 방식을 고집하고 있다"며 "사업부를 분사해 미국처럼 전문경영인 체제로 가야 이사진도 의미가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호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