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내 반도체 산업의 육성을 위해서는 반도체특별법의 조속한 처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특히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 제정을 놓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연구개발 인력의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 적용 문제를 놓고 의견 차이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상황이다.
민주당으로서는 52시간 근무제가 근로기준법 준수라는 당의 정체성과도 관련돼 있으나 한국경제 핵심인 반도체 산업을 살리기 위해 국민의힘과 타협점을 찾을지 주목된다.
8일 재계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업계의 상황이 엄중해 반도체특별법 제정을 서둘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는 최근 입장문을 통해 "보호무역강화와 정치적 혼란 등 경영불확실성이 가중되고 있다"며 "반도체특별법 제정 및 인프라지원을 비롯해 주력산업에 대한 통상대응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국회의 적극적 입법활동과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반도체클러스트가 들어설 용인특례시의 이상일 시장도 최근 기자들과 만나 "반도체특별법은 국가 미래 경쟁력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며 "국회와 정치권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위기를 직시하고 반도체특별법을 속히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도체특별법을 통한 국가적 지원으로 한국 수출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지 못하면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로봇, 전기차, 가전은 물론 우주항공과 방산 등에서도 산업을 선도할 능력이 떨어질 수 있는 만큼 발빠른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세계최대 회계 및 컨설팅기업 딜로이트에 따르면 생성형 인공지능에 최적화된 칩 시장은 2024년 500억 달러(약 72조6900억 원) 규모에서 2030년에는 1조 달러(약 1453조 원)로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듯 반도체 시장 상황이 급변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내 반도체 기업들이 놓인 처지는 녹록지 않다는 분석이 많다.
주형열 딜로이트 컨설팅 전무는 '반도체 산업 전망과 주요 이슈' 보고서에서 "한국은 그동안 반도체 강국이었으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정에서 경쟁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의 반도체 기술발전으로 한국 기업들의 시장 영향력이 위협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정책으로 경쟁심화가 우려된다는 지적으로 풀이된다.
우리나라 최고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가 지난해 예상에 미치지 못한 잠정실적을 발표하면서 시장에 충격을 준 것도 위기감을 키우고 있다.
삼성전자는 2024년 4분기 매출 75조 원, 영업이익 6조5천억 원을 거둔 것으로 잠정집계됐다. 애초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실적으로 매출 77조9천억 원, 영업이익 8조5500억 원을 점쳤던 것과 괴리가 큰 셈이다.
삼성전자가 이처럼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거둔 배경에는 중국발 반도체 공급 과잉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중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은 공격적 생산량 확대로 D램과 낸드플래시의 가격이 급락하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최근 구형 D램인 DDR4를 시장가격의 반값 수준으로 판매하면서 공격적 가격정책을 펼친 것이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PC용 D램 범용제품(DDR4 8Gb 1Gx8)의 평균 고정 거래가격은 2024년 7월 2.1달러에서 11월 1.35달러로 35.7% 하락한 것으로 파악된다.
반도체업계에서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당장 무너질 위기는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재도약의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고 바라보는 의견이 많다.
▲ 전문가들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인공지능 산업의 성장에 따라 적자생존의 구조가 뚜렷해지고 있다고 바라보고 있다. <그래픽 비즈니스포스트>
특히 연구개발 인력의 주52시간 근무제 완화문제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민의힘은 반도체 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연구개발을 비롯한 분야의 고연봉 전문직에 한정해 당사자 사이 합의로 주52시간제 적용하지 않을 수 있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잼션’과 직접 보조금 지원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반도체특별법을 당론으로 정한 상태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반도체와 같은 특정 업종에만 주52시간 예외를 두는 것은 근로기준법의 취지를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는 의견이 우세한 것으로 파악된다.
민주당은 현행 선택근로시간제(노동자대표와 서면합의에 따라 연속 16주 간 주 80시간 한도의 장시간 노동을 허용하는 제도), 탄력근무제(6개월 내 최대 64시간 연장근로를 허용하는 제도) 등을 활용한다면 기존 제도로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는 것을 주된 근거로 한다.
다만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연구개발 영역에서 근로시간 통제로 효율성 저하 문제를 인정하면서 제한적 완화를 검토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바 있어 협상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재명 대표는 2024년 11월11일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연구개발이 필요한 영역에서 근로시간을 통제하면 효율성이 떨어지고 노동자 자신에게도 불리하다는 주장이 있다”며 “실제로 그런 면이 있을 것으로 생각돼 검토하려고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진성준 민주당 정책위의장도 최근 "반도체 업계에 실제 연구개발직 근로시간이나 근무형태, 근로기준법상 예외제도 활용현황을 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며 "필요하다면 근로기준법상 예외를 보완하는 방법을 검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제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업과 같은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여야가 조속히 합의해 글로벌 주요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미흡한 국가 차원의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박종배 건국대학교 교수는 대한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린 ‘첨단산업 필수인프라 세미나’에서 “전 세계는 첨단반도체, 데이터센터 등 인공지능 산업 활성화에 국가적 역량을 쏟는 소위 ‘전자생존(電子生存)의 시대’에 돌입했다”며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법의 조속한 제정과 전력인프라 강화를 빠르게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장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