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상계엄 여파로 정국이 혼란하다. 일부 유통업계는 엎친 데 덮친 격의 큰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 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윤석열 탄핵 및 구속을 촉구하는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관련 손팻말과 응원봉을 들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주 한국은 매우 숨 가쁘게 돌아갔다. 불법 비상계엄 사태가 터졌고, 나흘 만에 대통령 탄핵 시도가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불발됐다.
정국의 혼란에 따른 불확실성은 당분간 피하기 어렵다. 금융을 비롯한 국내 경제 전반에도 벌써부터 냉기가 돌고 있다.
반도체를 비롯한 국내 주요 수출산업에서는 곡소리가 나기 시작한 지 오래인데 앞으로 얼마나 더 혹한기를 버텨야 할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와 힘을 합쳐 대외 환경에 대응해야 해도 모자랄 판에 정부가 스스로 신뢰를 잃은 탓에 자칫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유통업계도 마찬가지다.
유통업은 사람들의 심리와 매우 밀접한 산업이다. 소비자의 관심사나 행동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점도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국내 분위기가 위축된 것은 당연히 이들에게 좋을 리 없다. 벌써부터 연말 소비 성수기에 정치적 혼란 때문에 장사를 망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돈다.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을 살펴봤을 때 이런 시각은 결코 지나치지 않다.
2016년 10월 말 박 전 대통령 탄핵의 단초가 된 최순실씨의 태블릿PC 보도가 나왔을 때 소비자심리지수는 102.7였는데 촛불집회가 매주 펼쳐지면서 이듬해 1월 93.3까지 떨어지며 지속 하락했다.
소비자심리지수는 100보다 높으면 소비자들의 기대심리가 낙관적임을, 100보다 낮으면 비관적임을 보여준다.
2017년 4월이 돼서야 소비자심리지수는 100을 넘겼다. 헌법재판소가 박 전 대통령의 탄핵안을 인용하자 그제야 정치적 불확실성이 제거돼 소비자 심리도 회복됐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을 제외하면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연말 소비심리는 나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위축됐던 2020년 말, 가파른 금리 인상의 여파가 미쳤던 2022년 말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연말 소비심리는 100 이상을 보인 것으로 나타난다.
올해도 비상계엄 사태만 아녔다면 이런 경향은 유지됐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오판 탓에 12월 장사를 장담하기 어려운 유통업계가 많다.
그나마 연말 소비 대목에 바짝 매출을 올리면 올해 부진했던 실적을 상쇄할 수 있었을 테지만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일 때문에 기대가 무너졌다는 반응도 심심찮게 나온다. 일부 중소기업들 사이에서는 대통령실이 위치한 용산을 때려 부수고 싶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당장 눈을 돌려 보면 어수선한 분위기 탓에 직격탄을 맞은 유통업계가 한둘이 아니다.
면세업계는 환율 리스크 때문에 타격을 받고 있다. 면세점은 달러를 기준으로 상품을 팔기 때문에 환율에 매우 민감하다. 환율이 오르면 면세점의 매입 부담이 늘어날 뿐 아니라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가격도 올라간다.
올해 초 원/달러 환율이 1400원에 육박하자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과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아져 장사가 어려워졌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비상계엄 이후에는 원/달러 환율 1400원대가 이른바 ‘뉴노멀’이 돼가는 있는데 한해 실적 부진 때문에 한껏 움츠렸던 면세업계가 아예 자포자기하는 상황에 몰리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든다.
홈쇼핑업계도 엎친 데 덮친 격은 매한가지다.
홈쇼핑업계가 방송사업자들에게 줘야 하는 송출수수료 탓에 큰 위기를 겪은 지는 벌써 한참됐다. 100원을 팔면 방송사업자들이 최소 50원 이상을 떼어가는 것이 홈쇼핑업계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다.
45년 만의 비상계엄 사태는 홈쇼핑업계의 표정을 더욱 어두운 낯으로 만들고 있다. 계엄 여파가 어떻게 번지는지, 혹은 어떻게 수습되는지 알기 위해 사람들이 TV뉴스에만 눈을 고정하면서 홈쇼핑채널은 느닷없이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밝은 톤을 유지하며 물건을 팔아야 하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이조차도 시청자 앞에 웃는 얼굴로 나오는 것이 어렵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연말 세일에 나선 백화점 등도 크리스마스 대목에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냐는 비관적 관측도 꾸준히 이어진다.
실제로 홈쇼핑과 백화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정국 때 모두 매출 하락을 경험한 업계들이다.
유통업계는 그러지 않아도 올 한해 매우 힘들었다. 고금리와 고물가의 타격을 받아 지난해보다 더 좋은 실적을 낸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연말 특수를 기다려온 곳이 바로 유통업계인데 계엄 후폭풍으로 한동안 낯빛이 더 어두워질 수밖에 없게 됐다.
이쯤 되면 어떻게든 정치적 불확실성이 해소되는 것만이 유통업계의 유일한 희망으로 보이지만 현재로서는 이마저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현실이 더 암담하다.
‘불법 비상계엄’, 그리고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해야 한다”고 말했던 여당 대표의 말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데 일이 순리대로 안 풀리는 모양이 그저 답답하다. 쉽게 생각하면 될 일인데 온갖 수사로 순리에 역행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화가 난다.
주저하는 사이 일부 유통업계는 잘못하면 회복 불능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꼭 일부 정치인들이 부디 생각했으면 한다. 남희헌 유통&성장기업부 부장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