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최근 배터리 용량을 줄이고 가격을 낮춰 잇달아 출시하고 있는 실속형 전기차 모델들이 전기차 '캐즘' 극복의 불씨를 댕길 수 있을지 주목된다. 사진은 캐스퍼 일렉트릭 프리미엄 트림. <현대자동차> |
[비즈니스포스트] 현대자동차와 기아가 최근 배터리 용량을 줄여 전기차 판매 가격을 낮춘 실속형 전기차 모델을 잇달아 출시하고 있다.
이들 실속형 전기차 모델들은 국내 인증 기준 1회 충전 주행거리가 기존 모델보다 줄었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먼 거리를 주행할 수 있어 국내 경제적 소비자들에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속형 모델들이 좋은 반응을 얻어 전기차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정체) 극복의 불씨를 댕길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18일 환경부 자동차 배출가스와 소음 인증시스템(KENCIS)에 따르면 기아는 최근 EV9 기본형 2륜구동(2WD) 모델 6·7인승에 관한 환경부 인증을 완료했다.
현재 국내에서 EV9은 99.8kWh(킬로와트시) 배터리를 탑재하고, 1회충전으로 501km(2WD 기준)를 주행할 수 있는 시작가격 7337만 원짜리 모델이 판매되고 있다.
새로 출시할 EV9 기본형 모델은 기존보다 20% 이상 짧은 1회 충전 주행거리 385km를 인증받았다. 이르면 올 하반기 기존보다 낮은 용량의 배터리를 품고 수백만 원 더 싼 가격에 판매를 시작할 것으로 관측된다.
현대차·기아는 최근 전기차 핵심 부품이자 가격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배터리 용량을 낮춰 가격을 인하하는 방식으로 경기침체 속 지갑을 닫은 소비자를 겨냥하고 있다.
지난 17일 현대차는 브랜드 엔트리(진입) 전기차 캐스퍼 일렉트릭의 기본형 모델인 '프리미엄 트림'을 새로 출시했다.
캐스퍼 일렉트릭 프리미엄 트림은 현대차그룹-LG에너지솔루션 합작법인에서 생산하는 42kWh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를 탑재해 1회 충전으로 278km를 갈 수 있다.
기존 모델의 49kWh 배터리보다 배터리 용량을 낮추면서 1회 충전 주행거리는 기존보다 37km 줄었지만, 판매가격은 2740만 원으로 기존보다 250만 원 싸졌다.
정부·지자체 보조금을 더하면 지역에 따라 1천만 원 대로도 구매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달 3일 현대차는 3천만 원대로 구매할 수 있는 아이오닉5, 아이오닉6, 코나 일렉트릭의 'E-밸류 플러스'(E-Value +) 트림을 출시했다.
현대차 아이오닉5, 아이오닉6, 코나 일렉트릭에서 운영하는 E-밸류 플러스 트림은 스탠다드(기본형) 모델과 동일한 배터리를 탑재하고, 1회 충전으로 각각 368km, 367km, 300km를 갈 수 있다. 다만 일부 사양을 간소화해 기존 스탠다드 모델보다 판매가격을 각각 290만 원, 250만 원, 210만 원 낮췄다.
보다 고용량 배터리를 탑재한 아이오닉5, 아이오닉6, 코나 일렉트릭 롱레인지 모델은 1회 충전 주행거리가 각각 485km, 524km, 417km다. 이들 모델과 비교한 E-밸류 플러스 트림 3차종의 판매 시작 가격은 각각 540만 원, 365만 원, 424만 원 더 저렴하다.
현대차는 기존 스탠다드 모델보다 가격을 더 낮춘 E-밸류 플러스 트림을 통해 용량이 낮은 배터리를 탑재한 모델의 가격 경쟁력을 올려 전기차 구매를 망설이고 있는 소비자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펼치는 것으로 풀이된다.
현대차·기아는 앞서 상반기엔 전기차 라인업의 상품성을 개선하면서 전기차 가격을 동결하거나 소폭 인하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했다.
지난 3월 출시된 현대차 아이오닉5 부분변경(페이스리프트) 모델과 5월에 나온 기아 EV6 페이스리프트는 배터리 용량을 늘려 각각 1회충전 주행거리가 27km, 19km 더 길어졌음에도 가격을 동결했다. 페이스리프트를 거치면서 디자인뿐 아니라 성능까지 개선하면서 가격을 동결한 것은 매우 이례적 사례로 여겨진다.
또 지난 3월 현대차는 코나 일렉트릭 가격을 트림별로 100만 원씩, 아이오닉6 가격을 트림별로 200만 원씩 내렸다.
▲ 지난 5월 기아가 기존 모델과 같은 가격으로 내놓은 EV6 부분변경 모델. <비즈니스포스트> |
하지만 역성장을 기록하며 세계적으로도 가장 심각한 침체기를 겪고 있는 국내 전기차시장 환경을 뚫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올해 3~9월 판매량을 보면 아이오닉5는 1만533대로 전년 동기보다 7대가 줄며 제자리걸음했고, 아이오닉6는 3074대로 51.6% 감소했다. 지난해 3~9월 판매량(1529대)이 저조했던 코나 일렉트릭만 같은 기간 판매량이 61% 늘었다.
EV6 역시 가격 동결에도 올해 5~9월 판매량이 전년 동기보다 18.4% 줄었다.
이에 현대차·기아는 가장 가격 비중 높은 부품인 배터리 용량을 낮춰 1회충전 주행거리를 일부 내주고서라도 가격을 낮추는 전략 펼치는 것으로 해석된다.
국내 전기차 주행거리 인증 기준은 세계 어느곳보다 까다롭게 진행되고 있다.
유럽 WLTP 인증은 도심주행에 맞춰 평균 시속 47km로 총 23km를 주행한다. 미국 EPA 기준은 도심주행에 고속주행을 추가해 두가지 주행에서 모두 모두 배터리가 방전될 때까지 시험한 뒤 측정한 값에 온도 등 변수를 고려해 0.7을 곱해 주행거리를 산정한다.
한국은 EPA 방식을 따르면서도 국내 도로 환경과 에어컨 가동, 외부 저온 환경 등을 고려한 보정식을 적용하고 있어 주행거리가 더욱 감소하게 된다.
일례로 EQS 450+는 유럽 WLTP 기준 1회충전 주행거리 780km를 인증받았지만, 국내 인증 기준으론 40% 가까이 깎인 478km에 그쳤다.
일반적 주행 환경에서 국내 시판 전기차들이 정부 인증 1회충전 주행거리보다 훨씬 더 먼 거리를 갈 수 있는 이유다.
이에 현대차·기아가 새로 내놓고 있는 전기차 기본형 모델들은 상대적으로 짧은 1회충전 주행거리를 갖췄음에도, 경제성을 중요시하는 소비자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매력적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차 관계자는 "캐스퍼 일렉트릭 프리미엄 트림 출시로 합리적 가격의 전기차 라인업을 강화함으로써 전기차를 향한 시장의 관심을 더욱 높여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허원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