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 레시피] ‘제임스 본드 VS 제이슨 본’, 냉전과 탈냉전의 스파이들

▲ 냉전 종식 후 007 시리즈가 퇴색하는 듯했지만, 용케도 되살아났다. 소련이 아닌 다른 악의 축을 상대로 내세우고 숀 코넬리, 티모시 달튼, 로저 무어 등 미남 배우 위주로 캐스팅했던 제임스 본드도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낯선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결과적으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한 22번째 007 시리즈 ’퀀텀 오브 솔러스‘(2008)는 시리즈를 기사회생시켰다. 사진은 퀀텀 오브 솔러스 영화 스틸컷. <네이버 영화>

[비즈니스포스트] 추석 연휴, 레바논에서 휴대용 전자기기가 폭발해 무장단체 헤즈볼라 단원들 다수가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는 해외 뉴스가 들려왔다. 지금은 특수 직군이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소위 ‘삐삐’에 이어 무전기 폭발 소식이 연달아 보도됐다. 

누가 어떻게 이런 테러를 기획했는지 분석하는 내용들을 종합해 보면 이스라엘의 첩보 조직인 모사드가 배후라는 설이 유력하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첩보 조직들이 있다. 미국의 CIA, 영국의 MI6, 소련의 KGB, 이스라엘의 모사드 등이다. 

모사드는 아르헨티나에 숨어 살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오랜 시간 추적 끝에 체포한 사례로 알 수 있듯 집요한 것으로 유명하다. 

모사드가 벌인 테러 작전을 담은 영화로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뮌헨’(스티븐 스필버그, 2006)일 것이다. 1971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이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에 의해 살해되자 모사드가 보복 작전을 벌인 실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묘사한 영화다.

첩보기관과 스파이는 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1950년대 인기를 끌었던 스파이 스릴러 소설들과 이를 원작으로 한 영화들은 꾸준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고 대표적인 작품이 ‘007 시리즈’였다. 이언 플레밍이 1953년 발표한 <카지노 로열>이 그 출발이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는 MI6 첩보요원으로 말끔한 양복을 입고 멋진 차와 첨단 무기를 장착한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본드걸을 대동한다는 특징이 있다.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매력과 화려하고 통쾌한 액션 등이 돋보이는 시리즈 대부분이 흥행에 성공했다. 

사실 007 시리즈의 성공 이면에는 냉전시대의 불안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어서 1991년 소련 체제가 붕괴하자 시리즈는 동력을 잃게 된다. 결국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의 특징과 매력은 냉전 체제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냉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007 시리즈와 정반대 지점에서 MI6 첩보요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도 있다. 존 르카레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토마스 알프레드슨, 2011)이다. 

때는 1973년으로 MI6에 잠입한 소련 스파이를 색출하는 플롯이지만 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사연이 등장한다. 정체성의 고뇌 같은 것은 없어 보이는 제임스 본드와는 달리 이 영화 속 인물들은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내비치고 실존에 대한 고민과 갈등을 짊어지고 있다. 

영화는 스파이 액션물이라기보다 인간 탐구 드라마처럼 느껴진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노래 ‘La Mer'는 아름답고 슬픈 정서를 한껏 고양시킨다. 

냉전 종식 후 007 시리즈가 퇴색하는 듯했지만, 용케도 되살아났다. 소련이 아닌 다른 악의 축을 상대로 내세우고 숀 코넬리, 티모시 달튼, 로저 무어 등 미남 배우 위주로 캐스팅했던 제임스 본드도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낯선 이미지로 탈바꿈했다. 결과적으로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한 22번째 007 시리즈 ’퀀텀 오브 솔러스‘(2008)는 시리즈를 기사회생시켰다. 

이렇게 제임스 본드의 생명을 이어나간 흐름이 있는가 하면 제임스 본드를 완전 새로운 각도에서 재창조한 계열의 시리즈도 있다. 

바로 ’본 아이덴티티‘(2002), ’본 슈프리머시‘(2004), ’본 얼티메이텀‘(2007), ’본 레거시‘(2012), ’제이슨 본‘(2016)이라는 ‘본 시리즈’다. 맷 데이먼이 주연한 앞의 세 편을 보통 ‘본 삼부작’이라 부르고 뒤의 두 편은 흥행이나 평가가 삼부작에 미치지 못한다. 

‘본 시리즈’의 주인공은 이름부터 제임스 본드와 유사하지만 살짝 비틀어 놓은 제이슨 본이다. 후줄근한 차림새에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싸우고 본드걸 같은 건 없다. 잠시 인연을 맺은 여성도 영화 초반 관객이 놀랄 정도로 빠르게 죽는다. 

제임스 본드와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제이슨 본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자신의 기원을 찾는 여정을 떠난다는 점이다. 미국 CIA 첩보요원이었던 제이슨 본은 조직에서 버림받고 기억을 잃은 상태다. 

20세기 냉전 시대 제임스 본드과 21세기 탈냉전시대 제이슨 본은 여러 가지로 대조적이다. 대중 서사 장르적인 측면에서 보면 시대에 맞게 새 옷을 입으며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픽션과 현실이 맺는 관계를 생각하면 스파이 스릴러를 보는 심정이 착잡해지나 관객으로 영화를 즐길 권리가 있는 법이니 연휴 뒤 맞이하는 주말에 스파이 스릴러 감상도 괜찮을 거 같다. 이현경 영화평론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으로 평론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인문학 강의를 해오고 있다. 평론집 '영화, 내 맘대로 봐도 괜찮을까?'와 '봉준호 코드', '한국영화감독1', '대중서사장르의 모든 것' 등의 공저가 있다. 단편영화 '행복엄마의 오디세이'(2013), '어른들은 묵묵부답'(2017), '꿈 그리고 뉘앙스'(2021)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다. 영화에 대해 쓰는 일과 영화를 만드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